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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옷을 입었지만, 잘 어울리지는 않았다

백예린 정규 3집 [Flash and Core] 총평

by 고멘트

지금은 함께 언급하기 조심스러운 사이가 되었지만, 한때 구름은 백예린에게 있어서 최적의 파트너였다. 2015년에 발매된 EP 1집 [FRANK]부터 곡 작업을 같이 해오면서, 그는 그 당시 백예린이 가진 음악적 강점과 지향점을 본인의 음악에 잘 녹여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그녀가 ‘감성 싱어송라이터’로서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데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은 ‘우주를 건너’, ‘Bye bye my blue’,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거야’, ‘Square’는 모두 백예린의 감성에 구름의 로파이하고 몽환적인 인디팝 사운드와 프로듀싱이 더해진 결과물이었다. 뒤이어 정규 1집 [Every letter I sent you.](2019)와 정규 2집 [tellusboutyourself](2020), 그리고 밴드 ‘더 발룬티어스(The Volunteers)’ 활동까지 많은 음악 작업을 함께 하면서 그는 백예린의 음악 커리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조력자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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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예린이 구름과 함께 만들어온 앨범들


그렇기에 구름과의 결별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뒤, 사생활에 관련된 부분만큼 향후 백예린의 음악적 행보에 대해서도 우려의 시선이 있었다. 함께 음악 작업을 했던 시간이 길었고 대표곡의 흥행을 보증했을 뿐만 아니라, 백예린의 음악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도 구름이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구름이 전에 몸 담았던 밴드 ‘치즈(CHEEZE)’의 음악 스타일이 그의 탈퇴 전후로 크게 달라졌고, 이전에 리스너들이 선호했던 개성이 없어져서 아쉽다는 평가가 있었기 때문에, 백예린에게도 비슷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백예린은 자신의 음악적 개성을 새로운 방향으로 해석해줄 또 다른 동료를 찾아냈다. 올해 5월 싱글 [I MET PEEJAY]를 발매하면서 프로듀서 PEEJAY와의 협업을 공식적으로 알렸고, 그로부터 5개월 후 마침내 기존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은 정규 3집 [Flash and Core]로 복귀하였다.



35308405.jpg 백예린 정규 3집 [Flash and Core]

이번 앨범에서는 전반적으로 이전 곡들에서 비롯된 이미지와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어둡고 묵직한 질감의 건반과 신스 사운드, 날카롭게 내리꽂히는 드럼 비트를 전면으로 내세운 것부터 이전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준다. 또한 트립합(‘No man’s land’), 드럼앤베이스(‘DUST ON YOUR MIND’, ‘save me’, ‘Teary lover’)와 같은 일렉트로닉 장르와 재즈, 훵크(‘MIRROR’, ‘Another season with you’, ‘Television star’) 등의 흑인음악 장르를 비중 있게 차용하여 리듬감과 역동성이 더해진 것도 특징적이다. 이는 이전 곡들이 대체로 템포가 느리고, 밝고 서정적인 느낌이 강했던 것과 매우 대조된다. 정규 2집에서도 딥하우스(‘"HOMESWEETHOME"’, ‘0415’), 신스팝(‘Ms. Delicate’), UK개러지(‘Bubbles&Mushrooms’)와 같은 일렉트로닉 장르를 시도하긴 했었지만, 로파이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사운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앨범에 드러난 음악 스타일의 변화는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로 느껴진다.


백예린 - No man's land (feat. Qim Isle)


다양한 장르를 차용한 만큼 다이나믹하고 변화무쌍한 트랙의 전개는 이 앨범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1집과 2집의 수록곡들은 백예린의 감성적인 이미지에는 잘 어울렸지만, 앨범 단위로 듣기에는 각 트랙들이 특색 없이 비슷하게 흘러가는 듯해서 지루하게 느껴졌다. 반대로 3집의 수록곡들은 비트와 사운드가 상대적으로 다양해서 각 트랙의 정체성이 뚜렷하게 느껴지고 트랙을 따라가는 재미가 보다 있는 편이다. 하지만 그만큼 트랙 간의 흐름이 어색하거나, 감정선의 높낮이가 급격하게 떨어지거나 높아지는 부분이 있는 게 아쉬웠다. ‘MIRROR’의 훵키한 흥겨운 트랙에서 ‘Put it back on’의 잔잔한 발라드 트랙으로 넘어갈 때 텐션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부분이나, ‘Take pills’의 다크한 일렉트로닉 트랙에서 ‘Another season with you’의 밝고 경쾌한 트랙으로 전환되는 부분에서는 변화가 너무 갑작스러웠고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저점과 고점의 차이가 너무 컸던 탓이다. 분위기를 바꾸거나 어두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목적이라고 해도, 각 트랙을 좀 더 자연스럽게 들릴 수 있는 위치에 배치하거나 일부 트랙을 제외했다면 감상에 더 좋았을 것 같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반적으로 사운드와 비트의 존재감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보컬이 밀리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백예린의 보컬 특유의 여린 음색을 서늘한 느낌이 나도록 바꾸는 데는 성공했으나, 사운드의 타격감이 강할수록 보컬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따로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또한 백예린이 이전까지 강점으로 내세워 왔던 떨림이 강조되는 음색과 섬세한 감정 표현이 어둡고 강한 사운드에 맞춰가는 과정에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부분도 이전의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존재감이 컸지만, 이전보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백예린의 보컬이 힘을 제대로 발휘한 트랙은 오히려 ‘MIRROR’나 ‘Another season with you’, ‘Television star’와 같은 훵키하고 재지한 트랙이었다. 반대로 ‘No man’s land’와 ‘save me’ 등의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강한 트랙에서는 어두운 분위기에 비해 백예린의 랩과 보컬 톤이 상대적으로 밝고 힘이 약하게 들려서 곡과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일렉트로닉이나 힙합 대신 훵크와 재즈 기반의 R&B 위주로 트랙을 구성했다면 백예린의 원숙미와 보컬리스트로서의 강점을 모두 가져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백예린 - MIRROR MV




결과적으로 백예린의 정규 3집은 이전의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이 본인에게 잘 맞는 옷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이전 곡의 흔적을 지우려다가 본인의 강점도 지워지고, 잘 어울리지 않는 사운드와 장르를 억지로 소화하려는 느낌이 드는 게 이 앨범의 가장 아쉬운 지점이다. 음악적으로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던 건 좋은 시도였지만, 그것이 본인에게 잘 맞는 음악이었는지를 더 객관적으로 판단했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앞으로도 프로듀서에 따라 음악의 분위기와 스타일이 크게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보이는 게 우려스럽다. 물론 앨범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본인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부정할 의도는 없지만, 그동안 자신의 음악을 만들고 아티스트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프로듀서에게 많이 의존해온 것 같다는 생각이 이번 앨범을 들으면서 더 크게 느껴졌다. 적어도 과거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을 원한다면, 이전의 흔적을 덮는 데에 급급하기보다 아티스트로서 본인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고,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음악이 무엇인지를 숙지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아티스트로서 새로운 분기점을 지나고 있는 만큼, 이번 앨범을 통해 앞으로 본인이 만들어갈 음악과 이미지에 대한 해답을 새롭게 찾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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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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