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RAIN, TRADE L, 백예린, Khalid 외
Noey : '상처 3부작'의 최종장으로, 개인의 상처를 다뤘던 [PAINGREEN], 위안을 찾던 [PRIVATE PINK]를 지나, 이번엔 사회적 문제와 개인 간의 연대로 시선을 넓혔다. 그간 자기 고백에 가까웠던 서사가 조금 더 현실을 향해 열린 셈이다. 주황빛이라는 색이 상징하듯 앨범은 밝음과 탁함이 공존하는데,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았지만 그 위로 살아가야 하는 감정이 곳곳에 묻어난다. 사운드적으로는 전자음악의 비중이 눈에 띄게 늘었다. 첫 트랙 ‘불기둥’의 강렬한 신시사이저와 브레이크 비트, ‘BROKEN HILL’의 투스텝 리듬, ‘UTOPIA’의 덥스텝 사운드는 차가운 공기를 흔들며 강한 긴장감을 만든다. 그렇다고 거칠지만은 않다. ‘POVIDONE’과 ‘짠’에서는 피로를 풀어주는 듯한 따뜻함이, ‘SELL FISH’ 같은 트랙은 얼터너티브한 질감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렇게 각 트랙은 서로 다른 장르를 오가지만, 앨범은 하나의 흐름으로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최근 국내 R&B 씬은 보컬 톤이나 전반적인 무드에 초점을 맞춘 경향이 강하다. 특히 남성 R&B 아티스트의 경우, 트랩 소울 같은 트렌디한 사운드 위 힙합적인 어조와 짧은 문장을 중심으로 곡을 풀어내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분위기와 스타일이 앞서는 흐름 속에서, A.TRAIN은 입체적인 작법과 세밀한 편곡으로 차별화를 이뤄냈다. 나아가 이번 앨범을 통해 주제를 확장하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였고, 덕분에 그가 지금 어떤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 또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음악을 하고 있는지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감정, 사운드, 메시지 중 어느 것 하나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완결이다.
엉얼 : 정규 1집 [Mr. Independent] 발매한 지 단 5개월 만인 10월 16일, 정규 2집 [WHEN U TIPSY]를 발매하였다. 정규 앨범을 짧은 기간에 연속적으로 내놓은 것도 놀라운 점이지만, 정규 1집과 2집 사이에 발매한 EP와 싱글, 그 외 피쳐링까지 여러 작업물을 내놓으며 쉬지 않고 허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음악적인 변화 또한 눈에 띈다. H1GHR MUSIC에서는 빠른 플로우 중심의 랩을 했으나 이후 점차 싱잉의 비중을 높여왔다. 전속계약 종료 후 발매된 정규 1집은 트랩, R&B, 붐뱁 등 다양한 힙합 사운드를 채용했으나 이번 앨범은 R&B/Soul로 감성적이고 보컬 중심적인 멜로디컬 한 앨범으로 제작했다.
앨범은 전반적으로 Chill 한 바이브를 기반으로 여유롭고 가볍게 리듬을 탈 수 있는 트랙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비트 초이스에 있어서도 미니멀한 드럼 비트와 피아노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앨범의 무드를 전달하였다. ‘WHEN U TIPSY’에서 ‘MISS CALI’로 넘어가는 구간에서는 트랙 간의 연결성도 챙겨줬다. 그러나 개인적인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국내 힙합 신에는 Leellamarz, Gist와 같이 비슷한 감성으로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들이 존재하는 점, 그리고 이번 앨범이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의 사운드와 구성이 반복되어 다소 단조롭게 들리는 부분이 있었다. 또한 ‘SAY YES’와 ‘TAKE A BITE’ 등 감성적인 트랙은 보컬 튠 운용과 스타일이 Sik-K와 유사한 느낌을 받아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느 정도 아는 맛을 느꼈던 것 같다.
TRADE L은 '고등래퍼4' 인터뷰 때의 '올라운드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라는 말을 지켜가고 있다. H1GHR MUSIC 입단 때부터 큰 포텐셜을 보여줬으며, 이후에도 꾸준하게 작업물을 발매하고 있다. 하지만 'TRADE L'이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아직 명확하게 '이런 아티스트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보컬과 랩도 기술적으로 좋아졌지만 그럼에도 큰 반응이나 성과를 얻은 작업물이 없었던 것 같다. 다음 앨범에서는 TRADE L만의 특별한 무기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숙제가 될 것 같다.
iforyoursanity : 구름이 아닌 피제이와 첫 정규 앨범. 앨범 커버에서 팔짱을 끼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백예린은 이전 소녀스러운 모습보다는 강하고 성숙해진 여성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돌아왔다. 풀어헤친 긴 머리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우리가 기억하던 백예린이라면, 이번엔 머리를 깔끔히 올려 묶고, 바지를 택했다. 감성을 자아내는 따뜻한 색감의 필름 필터가 백예린 앨범 커버의 상징이었다면, 이번엔 채도를 완전히 뺀 흑백이다. 이렇듯 이전보다 강해진 느낌은 비쥬얼에 이어 사운드에서도 드러난다. 기존 구름과의 음악은 따뜻한 EP 사운드 위에 서정적인 백예린 보컬이 두드러지는 형식이었다면, 피제이와의 사운드는 단단하고 날카롭고 차가워졌다. 이러한 변화는 인트로 트랙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난다. 마이너한 분위기 속 하나의 음을 반복적으로 연주해 긴장감을 더한다. 차가운 드럼 사운드와 기계음에 가까운 신디사이저는 그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그럼에도 이번 앨범이 강해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강하고, 다양하다. 대중이 기억하고 좋아했던, 구름과 함께한 백예린의 스타일은 뚜렷이 떠오르는 만큼 한정적이다. 구름과도 다양한 장르에 손을 뻗긴 했지만 대표성을 지닌 음악은 몽글한 피아노 위 푹 잠기게 하는 보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앨범에서 백예린은 제대로 다양한 장르에 도전했다. 우선 흑인음악 장르를 주로 해오던 피제이와의 협업인 만큼 힙합과 알앤비의 비중이 커졌다. 래퍼 김아일과 함께한 ‘No man's land’에서는 가창보다는 랩의 형태에 가까운 읊조리는 듯한 사운드에 도전한다. 타이틀 곡인 ‘MIRROR’와 ‘in the middle’에서는 알앤비를 축으로 백예린의 보컬이 빛을 발한다. 또한 어두운 분위기의 날카로운 전자음 기반 ‘DUST ON YOUR MIND’, ‘Take Pills’, ‘Karma calls’ 같은 곡들은 이번 시즌 변화된 백예린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전 백예린의 서정적인 감각은 ‘Put it back on’, ‘TO’ 등을 통해 여전하나, 이번엔 좀 더 깊고 무겁게 감정을 전한다.
이러한 변화는 백예린이 새로운 음악적 언어를 모색하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구름과 함께 만들어온 사운드에서는 감정을 부드럽게 표현했다면, 피제이와의 협업은 그 감정을 다른 질감으로 번역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런데 분명 새로운 시도 자체는 좋았으나, 그 변화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전작들의 인상만큼 뚜렷한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앨범을 통해 변화의 방향성은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고, 색을 확장하려는 의지 또한 감지할 수 있었다. 이번 시도를 토대로 선명한 차별성을 다듬어, 다음 시즌에서는 또 하나의 뚜렷이 기억될 '고유의 백예린'을 선보일 수 있길 바란다.
iforyoursanity : 남성 알앤비 아티스트로 기억되던 칼리드에게 작년 말, 아웃팅이라는 변화가 있었다. 말 그대로 스스로 택한 것은 아니나, 외부로 인해 커밍아웃을 하게 된 것. 당시 칼리드는 곧바로 인정하며 개의치 않아 하는 태도를 보여왔으나, 해당 사건 이후로 음악을 통해 세상 앞에 등장한 것은 이번 앨범이 처음이다. 그리고 그는 댄스 음악을 가지고 돌아왔다. LGBTQ+ 음악의 흐름을 더듬어보면 그의 선택이 어색하지 만은 않다. 여전히 이들에게 찬가로 불리우는 Diana Ross의 ‘I'm Coming Out’ 은 디스코와 펑크 기반의 곡이었으며, 그 유명한 Lady Gaga의 ‘Born this way’ 또한 댄스 팝이었다. 좀 더 최근에는 Troy Sivan이 ‘Rush’를 통해 문화적 오리지널이 담긴 하우스를 가져왔고, 작년 히트를 쳤던 Chappell Roan의 ‘Good Luck, Babe!’ 역시 신스 팝이다. 직전 앨범 [Sincere]의 진지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재밌고 시시덕거리는, 즉 가벼운 면을 보여주고 싶어 한 Khalid에게, 음악적 표현에 있어 댄스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after the sun goes down]라는 앨범명, 춤과 음악에 취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앨범 커버, 댄서블한 사운드, 뮤직비디오 속 남성과의 스킨십, 댄스 안무 등은 그가 표현하려던 '가벼움'을 정확히 표현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LGBTQ+ 컬처 안에서 '가벼움'이란 단지 가볍게 노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차별과 억압 속에서 그들이 만들어낸 폐쇄적 공간은, 춤과 음악을 통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해방의 장이었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발전해 온 '가벼움'은 단순한 향락이 아니라, 존재를 해방시키는 퍼포먼스다. 따라서 Khalid의 이번 변화는 단순히 장르적 이동이 아니라, LGBTQ+ 문화가 음악을 통해 취해오던 태도와 미학 속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파격적인 변신이었지만, 문화적 맥락에서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특히 댄스 음악이라는 문화적 맥락을 담아내면서도, Khalid 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은 음악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전형적인 클럽튠 속에서도 그가 가진 R&B적 멜로디와 음색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R&B 남성 아티스트였던 그가 이제는 퀴어로서 춤추며 존재하는 아티스트로 재탄생했다. "아티스트로서 진정 원하던 것을 할 때가 왔다"는 그의 말처럼 이번 앨범이 '진짜 자신'으로서 음악을 만들어갈 수 있는 첫 장이 되길 바란다.
엉얼 : 2025년 1월, 빌보드에 [Jump Out]한 OsamaSon이 [psykotic]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전작은 멜로딕한 느낌의 돈, 여자, 마약이란 키워드였다면, 이번 작은 그런 키워드는 유지하되 보다 더 원초적인 키워드를 가지고 진행되며 어둡고 공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제목과 앨범 커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앨범의 전체적인 무드가 정신없고, 시끄럽고, 혼란스러울 것임을 예상해 볼 수 있다.
이에 맞게 트랙들은 전반적으로 거칠었다. 앨범은 시작은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베이스를 필두로 진행된다. 특히 1번 트랙부터 지저분하고, 귀를 찌르는 신스 사운드와 디스토션이 걸린 베이스는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앨범에서 사용된 사운드들은 파괴적이면서, 앨범의 큰 틀을 잡아준다. 반대로 ‘She woke up’, ‘yea i kno’와 같은 트랙들은 앨범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대비되는 멜로디컬 하고 밝은 느낌의 신스 사운드를 사용하며 공격적인 분위기를 중화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분위기를 풀어주는 트랙은 앨범 중간중간 배치되어 있으며 [psykotic]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표현한 것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의 rage는 흔히 혼란, 분노와 같은 주제로 사용된다. 하지만 OsamaSon은 분노의 최고조를 극한으로 표현하면서 다른 rage들과 에너지레벨에서 차이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난 후 다른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가 무엇이든 밋밋하게 들리는 걸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극단적이고 정신없는 rage를 만들었다고 느껴졌다. 공유하는 언어가 달라도 이런 감상을 느끼게 만든 OsamaSon의 다음 앨범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지 기대가 된다.
Noey : Rolling Stone UK, DIY 등 영국 주요 음악 매체들은 The Last Dinner Party(이하 라스트 디너 파티)의 등장을 두 팔 벌려 맞았다. 첫 등장에 쏠린 기대가 지나치게 컸던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이들의 음악이 글램 록, 바로크 팝을 오가며 한동안 영국 록씬이 보여주지 못했던 스케일과 드라마를 되살렸다는 점에서 그 반응은 어느 정도 이해된다. 실제로 이러한 영국 언론의 띄워주기 문화는 세대를 대표하는 밴드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했다. 문제는 때로 '그 정도인가?' 싶은 순간에도 언론이 먼저 박수를 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From The Pyre]는 라스트 디너 파티가 왜 지금 주목받는지 명확히 보여주며, 그 열기를 정당화하는 듯하다.
전작 [Prelude to Ecstasy]에 이어 이번 앨범 역시 인디 록, 글램 록, 바로크 팝, 팝 록을 유려하게 넘나 든다. 첫 트랙 ‘Agnus Dei’의 멜로딕한 기타는 앨범의 방향을 제시하듯 곡 전반을 관통하고, ‘This is the Killer Speaking’은 절도 있는 기타 리프와 단단한 드럼 비트, 곳곳에 쌓인 백킹 보컬이 매끄러운 하모니를 이룬다. 또한 곧바로 이어지는 트랙 ‘Refile’에서 점진적인 템포 변화로 예상을 뒤엎는가 하면, 피아노 발라드 ‘Sail Away’로 앨범의 기세를 부드럽게 감싼다. 트랙들은 Sparks부터 Queen, David Bowie까지 70년대 록의 향을 물씬 풍기지만, 그 시절의 양식을 그대로 베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대의 화려함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해,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질감을 만들어냈다. 전작이 짙은 편곡과 비극적인 정서를 품고 있었다면, 이번 앨범은 그 발자취 위에 ‘Agnus Dei’의 장엄함, ‘Rifle’의 예측 불가한 전개, ‘Sail Away’의 따뜻한 여운처럼 기교와 온기, 그리고 재치를 더하며 보다 유연하게 완성된다.
대부분의 아티스트가 여러 장의 앨범을 통해 정체성을 만들어갈 때, 라스트 디너 파티는 데뷔 싱글 ‘Nothing Matters’ 발매와 동시에 히트를 치며 완성형으로 등장했다. 그만큼 빠르게 집중된 이목 속에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으로 사랑받는지 정확히 알고 그것을 더 단단히 다듬어냈다. 결국 [From The Pyre]는 첫 성공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며, 라스트 디너 파티가 단발적인 주목에 머물지 않을 이유를 스스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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