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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K-보컬로이드 정상영업 합니다

구사의 [굿모닝]이 제시한 한국 보컬로이드의 방향성

by 고멘트

최근 국내 두 번째 한국어 보컬로이드 UNI(이하 유니)를 활용한 앨범 [굿모닝]이 공개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앨범은 흥미로운 시도라 생각하지만, 동시에 한국 보컬로이드 씬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이기도 하다. 실제로 해당 앨범은 음원 사이트에 정식 공개되지 않고 유튜브에만 업로드되었으며, 공개된 지 2주가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조회수는 약 400회, 댓글은 17개에 그친다. 반면, 일본의 상황은 정반대다. Hatsune Miku (이하 하츠네 미쿠)의 내한 공연이 전석 매진을 기록했고, 다양한 보컬로이드 캐릭터가 이미 하나의 IP 산업으로 정착했으며, 더 나아가 팬덤·커뮤니티·콘텐츠 산업이 맞물린 거대한 서브컬처 생태계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극명한 대비 속에서 구사의 [굿모닝]은 신곡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어쩌면 '한국에서 보컬로이드 음악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불을 붙이는 작은 실험이 될 지도 모르겠다.




일본에서 보컬로이드 산업은 2004년 야마하(Yamaha)가 첫 버전을 선보인 이후, 2007년 하츠네 미쿠의 등장과 함께 하나의 현상으로 급격히 성장했다. 단순히 음악 소프트웨어를 넘어 일본의 캐릭터 산업과 결합하며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이 된 것이다. 일본은 이미 애니메이션, 게임, 아이돌 산업이 정교하게 발달한 나라이다. 즉, 가상 캐릭터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이 충분히 마련된 상황이었고, 하츠네 미쿠의 성공은 예견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보컬로이드 특유의 기계적인 음색은 결함이 아닌 정체성으로 재해석되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츠네 미쿠 제작사인 '크립톤'이 취한 개방적인 저작권 정책이 한몫했다. 크립톤은 하츠네 미쿠의 음성과 이미지 사용을 폭넓게 허용했고, 오히려 팬들이 자발적으로 2차 창작물을 만들 수 있도록 장려했다. 이러한 정책은 일본의 영상 플랫폼 '니코니코 동화'와 맞물리며 폭발적인 성공을 이끌었다.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곡을 업로드하고, 소비자들은 이를 리믹스하거나 일러스트 또는 영상으로 재가공했다. 다시 말해, 보컬로이드가 하나의 '참여형 창작 문화'를 만들어낸 셈이다. 팬과 창작자가 경계를 허물며 서로의 창작물을 순환시키고, 그 결과 보컬로이드는 '장르'이자 '커뮤니티 기반 생태계'로 진화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창작자들은 인간 보컬이 가지는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고, 인간이 구현할 수 없는 고음역, 기계적인 리듬 등 실험적인 요소들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그 결과, 글리치한 사운드가 돋보이는 Iyowa의 [わたしのヘリテージ]나 슈게이즈 앨범인 [mikgazer vol.1], 아트팝인 kikuo의 [きくおミク3] 등 기존 대중음악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장르들이 파생되었다. 뿐만 아니라 거대해진 보컬로이드 씬은 수많은 일본 아티스트를 낳았다. Kenshi Yonezu, Ayase, Eve, ZUTOMARO 등 현재 일본 메이저 음악계를 대표하는 상당수의 아티스트가 해당 문화를 통해 성장한 것이다. 정리하면, 일본에서 보컬로이드는 창작 문화에 대한 개방적 인식을 토대로 '팬과 창작자, 캐릭터와 음악이 결합된 새로운 예술 생태계'가 되었다.


스크린샷 2025-11-17 오후 3.46.48.png 국내 첫 보컬로이드 시유(SeeU)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보컬로이드 판도는 어떠한가. 한국 역시 2011년 첫 보컬로이드인 시유(SeeU)를 선보였으나, 성우 이슈를 비롯한 여러 문제로 인해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활동이 단절되었다. 이후 2017년 유니가 등장하며 '한국 보컬로이드 부활'에 대한 주목과 함께 꾸준한 시도들이 이어오고 있었지만, 한국 시장은 여전히 작은 규모와 더딘 성장 속도를 보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복합적인 원인이 존재한다. 가장 먼저, '기술적 제약'이 근본적 장애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일본어에 비해 음절 구조가 복잡하고 종성이 발달하여 당시 보컬로이드 엔진으로 자연스러운 발음을 구현하는데 기술적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다. 최근에서야 완성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실사용 가능한 수준의 한국어 보컬 품질이 확보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었다. 다음으로는 '문화적 인식의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국내에서 보컬로이드는 오타쿠, 마이너, 서브컬쳐, 그리고 씹덕 음악이라는 딱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때문에 이러한 음악이 개성이 아닌 비주류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강했고, 이는 마치 국내 EDM, 클럽 씬이 겪는 주류 음악으로의 편입 한계와 유사한 맥락이기도 하다. 또, 한국 음악산업은 K-POP 시스템이 매우 견고하다 보니, 보컬로이드가 진입할 틈새 시장의 여지가 적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관련 인프라가 일본처럼 발달할 환경이 못 되었고, 보컬로이드의 성장 기반을 확보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라이브나 동인 갤러리 같은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간간이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대중화나 산업화로 이어지기엔 다소 무리인 상황이다.



이러한 정체된 상황 속에서 오랜만에 등장한 보컬로이드 앨범, 구사의 [굿모닝]은 유의미한 시도로 비춰진다. 그저 보컬로이드를 활용한 작품에 머무르지 않고, 글리치, 앰비언트, 그리고 자연음악적 질감을 결합해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컬로이드 음악이라 하면 대체로 EDM이나 록, 혹은 일본식 팝 감성이 중심을 이루었다. 기계적인 음색을 과장하거나, 빠른 전개 속에서 감정의 고조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이른바 ‘제이팝스러운’ 서사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굿모닝]은 이 공식을 과감히 비껴간다. 이 앨범은 보컬로이드의 목소리를 전면에 드러내기 보다는 전체 사운드에 녹여 넣는다. 전자음과 노이즈가 앨범 전반을 감싸며 여느 보컬로이드 음악처럼 거칠고 급진적인 전개를 보이지만, 그 속에서 섬세한 실험성이 드러난다. '겟업'에서는 새소리와 바람 같은 자연음을 전자음과 결합하고, '세발자전거'와 ‘Escape from Easter Blue’에서는 보컬로이드임에도 거의 순수 앰비언트 트랙에 가깝게 구사된다. '고시원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 역시 전자음과 노이즈 속에서 묘하게 자연친화적인 따스한 잔향을 남기며, 보컬로이드를 하나의 장르적 수단으로 활용하기 보다는, 사운드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일본의 보컬로이드 문화가 캐릭터 IP 중심으로 상업적인 확장이 이루어졌다면, [굿모닝]은 그와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보컬로이드를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음악적 실험의 매체로 포지셔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굿모닝]의 음악적 결이 최근 국내 인디 씬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실제 최근 인디 씬에서는 경치, archie, Now You’ll Never, Mydreamfever 등 글리치, 앰비언트, 인디트로니카, 그리고 자연이 생각나는 음악을 지향하는 아티스트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굿모닝]이 시도한 새로운 작법은 결코 뜬구름 잡는 실험이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앨범은 '보컬로이드 = 씹덕 음악'이라는 낡은 딱지를 떼어내고, 보컬로이드가 실험적 사운드의 매체로 기능하여 국내 인디 씬의 감성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정리하면, 유니를 비롯한 보컬로이드 시도들은 그 자체로 분명 의미 있는 도전이지만, 현실적으로 한국 대중문화의 주류로 편입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앞서 살펴본 대로 이는 단순히 콘텐츠의 완성도 문제를 넘어, 문화 성장을 뒷받침할 기술적 인프라의 부족, 창작 커뮤니티의 저조한 활동, 시장 규모의 한계가 동시에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사의 [굿모닝]과 같은 작업은 이러한 구조적 제약 속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앨범은 K-POP의 대척점이나 대안으로 존재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컬로이드가 ‘오타쿠 서브컬처’라는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음악적 실험의 매체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데에 의의가 있다. 따라서, 한국 보컬로이드의 미래를 논한다면, 그것을 하나의 거대한 문화나 산업적 성공으로 그리기보다는, 작지만 지속 가능한 실험적·예술적 장치로 인식해야 한다. 이제 남은 질문은 [굿모닝]이 빚어낸 미세한 파동이 앞으로 얼마나 자주, 얼마나 깊게 반복될 수 있을지다. 그 빈도와 깊이에 따라 한국 보컬로이드가 일회성의 실험으로 머무를지, 또는 그 틈새로 확장할 수 있을지가 결정될 것이다.




by. 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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