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방식’으로 살아남으려는 이유
최근 K-pop 업계에서는 더 이상 ‘음악과 퍼포먼스’만으로 팀의 성공을 판가름 짓기 어려운 흐름이 만들어지며, 무대 밖 요소 또한 중요해지고 있다. 오늘날 아이돌은 하나의 '콘텐츠 집합체’이자 '브랜드’로 기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 소비 패턴의 다층화, 그리고 팬덤의 요구가 다양해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대중은 아이돌을 더 이상 무대 위 모습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일상 콘텐츠, 팀의 아이덴티티, 팬과의 접점 방식 등 복합적 요소들이 모두 팀의 경쟁력을 구성하며, 아이돌은 이런 요구에 맞추어 팀만의 생존 전략을 확보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플랫폼의 등장은 아이돌의 화제성 구조 자체를 바꿔놓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컴백 주기가 길어도 무대 하나가 긴 여파를 남기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금은 인플루언서나 일반인들도 트렌드를 주도하는 경우가 생겨나며 트렌드가 시시각각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아이돌이 이전만큼의 파급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고, 이 때문에 엔터사는 더 많은 대중과의 접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플랫폼에 빠르게 대응하는 것이 필수 전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이브가 레이블 체제를 구축하며 많은 신인을 짧은 텀에 선보였듯이, 기존보다 신인의 데뷔 주기를 짧게 내며 새로운 IP를 확보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는 음악방송 활동이 1~2주 정도로 짧아진 대신, 무대만큼이나 SNS 챌린지 혹은 숏폼을 통해 화제성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빈번하게 활용된다. 이렇듯 대중의 관심이 빠르게 이동하는 오늘날의 시대성을 반영하여 다양한 플랫폼의 사용, 새로운 트렌드 및 IP 생성 등을 병행하는 것은 이제 기본적인 생존 조건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중요 요인은 국내 K-pop 소비층의 규모 감소했다는 것이다. 팬덤의 고정적 규모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팬층은 야구나 배구, 뮤지컬, e스포츠 등 다른 커뮤니티로 대규모 이동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젊은 연령층의 인구 규모가 자체가 줄어드는 구조적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엔터사는 더 이상 국내 시장만으로 팀의 성장을 담보할 수 없게 되었고, 해외나 특정 니치를 타겟하는 새로운 전략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PLAVE’와 같은 버추얼 아이돌, HYBE에서 야심 차게 데뷔시킨 글로벌 그룹 ‘KATSEYE’나 젠더리스 컨셉의 ‘XLOV’가 그랬듯이 말이다. 이러한 기반의 팀들은 시장의 변화 속에서 자연스레 출현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특정한 타겟 방향성을 설계하는 흐름은 조금씩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
대중에게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팀의 밈·콘텐츠·아이덴티티 등 무대 밖 브랜딩 적 요소들이 자주 보이고 있다. 또한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K-pop 업계에서는, 실시간 피드백이 활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상황도 보여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중국에서 큰 화제를 모으며 무려 ‘50억 뷰’를 기록한 원영턴을 안무에 넣었던 IVE의 ‘ATTITUDE’ 활동이 있다. 이에 따라 입소문을 타기도 했고, 활동을 하며 팬들에게 화제가 된 레이의 일명 ‘폭주기니’ 파트를 챌린지로 귀엽게 풀어내며 또 한 번의 화제를 얻는 데 성공했다. 또한, 활동 계획에 없던 수록곡이라도 SNS에서 반응이 생기면 빠르게 활동으로 전환하는 방식도 보이기 시작했다. KISS OF LIFE의 앨범 [Lose Yourself] 수록곡 ‘Igloo’의 경우, 앨범 쇼케이스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매력 있는 안무를 선보인 것이 크게 화제 되었고, 이후 타이틀 곡이었던 ‘Get Loud’만큼이나 ‘Igloo’ 무대를 많이 선보인 덕분에 타이틀 곡보다 훨씬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는 반응 중심의 활동 구조가 자리 잡은 건 엔터사 입장에서는 필수 불가결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팬과 대중의 관심을 빠르게 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전략이지만, 동시에 분명한 양면성이 존재한다. 지나치게 대중의 반응에 의존하다 보면, 팀이 본래 지니고 있던 방향성을 지키기 어려워진다는 한계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트렌드에 맞춰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중요해진 만큼, 오히려 팀이 지키려는 개성이 흐려지거나 타 팀과 컨셉이 겹칠 리스크 역시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지난 3월 10일 동시 발표된 ITZY 예지의 ‘Air’, RED VELVET 슬기의 ‘Baby, Not Baby’ MV는 특정 아티스트의 전반적인 톤과 연출 면에서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두 MV 모두 차의 깨진 창문 위에 올라타 노래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작년 여름을 ‘Brat Green’으로 물들이며 주목받았던 영국 아티스트 ‘Charli XCX’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트렌드에 따라 특정 스타일과 연출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자체 콘텐츠에 팀이 갖고 있는 확고한 아이덴티티를 담아내며 사랑받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물론, 이전에도 세븐틴의 ‘고잉 세븐틴’이나 BTS의 ‘달려라 방탄’처럼 비교적 긴 호흡의 예능형 콘텐츠를 통해 멤버들의 일상적인 모습과 팀워크를 꾸준히 보여주며 탄탄한 코어 팬층을 형성해 온 사례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콘텐츠는 ‘주기적으로 새로운 에피소드를 만난다’는 안정감 속에서 팬들이 팀을 장기적으로 따라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반대로 지난 8월에 데뷔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신인 ‘CORTIS(이하 코르티스)’의 경우, MZ들이 열광할 만한 모먼트를 정교하게 설계해 내며, 짧고 강한 인상을 통해 비 팬층에게까지 빠르게 도달한 팀이라고 할 수 있다. 코르티스의 자체 콘텐츠는 마치 유튜브 인기 채널 중 하나인 ‘숏박스’와 유사하기도 하다. ‘go home’, ‘아 이거 왜 하고 있지’와 같이 매우 짧고 강렬한 제목과 더불어 장난스럽고 과장된 썸네일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난 10월에 공개되었던 콘텐츠인 ‘마똥틴’의 경우, 실제 배설물을 사이에 둔 채 밀치기 게임을 진행해 폭소를 유발하며 SNS에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고, 해외에서 유행하는 역동적인 액션과 앵글의 숏폼까지도 완벽하게 소화하며 트렌드의 중심에 우뚝 섰다. 이처럼 아이돌인 동시에 꾸밈없고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포인트와 개성 있는 편집 톤은 MZ들 사이에서 꾸준히 화제 되며 여러 밈을 생성해 냈고, 아이돌을 잘 모르는 대중이더라도 이에 쉽게 공감하며 코르티스만의 자유로운 브랜딩을 완성하게 되었다. 비슷한 예시인 'ALLDAY PROJECT'의 경우, 일반적으로는 편집될 만한 장면이나 장난스러운 발언들까지 그대로 내보내며 현실감 있는 모습들로 독보적인 캐릭터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들은 단순히 대중의 관심을 이끄는 데 그치지 않고, 팀 자체를 하나의 독립적인 캐릭터로 브랜드화하는 효과까지 만들어낸 인상적인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최근에는 팀을 '하나의 이미지'로 일관되게 그려질 수 있도록 만드는 흐름 또한 강해졌다. 예컨대 팀 전체의 색감·서사·비주얼 톤이 명확하게 구축되면 팬들은 자연스럽게 그 이미지를 따라가기 마련이며, 이를 기반으로 팬들은 강한 MD 소비와 더불어 라이프스타일 적으로도 영향을 받게 된다. NCT WISH(이하 위시)가 이를 잘 구축해 나가는 팀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별’을 위시의 상징으로 지정하고 이를 별 모양 캐릭터인 ‘위츄’로까지 연결해 내며 앨범 곳곳에 디자인이 사용되기도 했다.
‘poppop’ 컴백 당시에는 ‘위시젤리’ 기업의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신선한 프로모션을 공개했었는데, 이는 이후 공개된 트레일러 <Melted WICHU Inside My Pocket>에서도 흐름을 이어갔다. 멤버 시온은 첫사랑 고백 방법을 ‘WishGPT’에게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건 연애 조언이 아닌 위시젤리 추천이었고, 이는 콘텐츠와 캐릭터를 유기적으로 연결한 독창적인 방식이었다. 이러한 방식들이 있었기에, 통통 튀는 매력의 일명 ‘위시 코어’를 완성해 내며 위시의 일관적인 이미지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팀의 이미지가 견고해진다는 뜻은, 팬들이 전체적인 분위기와 스타일에도 매력을 느낀다는 뜻이다. 이러한 감정은 자연스럽게 소비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기에, 엔터사 입장에서는 수익 구조 측면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한 팀을 깊게 파기보다는 여러 팀을 가볍게 즐기는 라이트 팬이 늘어나며 소비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그렇기에 분명한 이미지를 구축한다는 것은 단순한 콘셉트 요소가 아닌, 변화한 팬덤 구조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핵심 전략에 가깝다. 대중은 관심은 쉽게 이동하기에 흔들리지 않는 이미지는 팀을 기억하게 만들고 선택할 이유를 제공할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대중에게 각인되기 위해 흔히들 말하던 킬링파트를 꼭 만든다거나, 개성 있는 스타일링에 초점을 주는 등 무대 위에서 더 빛날 수 있도록 하는 전략들이 존재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오늘날은 단순히 아이돌이 무대 위에서 빛나는 것만이 아닌, 무대 밖에서도 대중들의 참여와 소비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음악 외적 부가 요소들의 중요성이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K-pop 아이돌의 변화는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기보다, 환경이 만들어낸 필연적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돌은 이제 단순한 퍼포머가 아닌, 하나의 브랜드로서 대중과 소통하고 다양한 부가 요소를 활용하며 생존 전략을 확장하고 있다. 물론 대중이 순간적으로 소비하는 시대이더라도, 팀의 음악적 퀄리티를 지키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결국 음악이라는 본질이 견고하지 않다면, 외적 콘텐츠와 브랜딩 전략도 코어 팬덤으로의 전환력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팀들 역시 음악적 완성도가 뒷받침되었기에 다양한 시도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아이돌은 다양한 브랜딩 전략을 펼치되, 팀만의 고유한 음악과 방향성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 두 축을 균형 있게 잡아낼 수 있는 팀만이 앞으로 K-pop 시장에서 더 오래, 더 단단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은 더 다양한 선택지를 갖게 되었고, 업계는 더 다층적인 IP 전략을 요구받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무대 위 모습을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각 팀이 어떤 부가 요소들을 동원해 브랜딩을 설계하는지를 읽어내는 것이 현재의 K-pop 아이돌 산업을 이해하는 핵심이 될 것이다.
By. J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