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는 건,

by 정림올제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찬 봄날, 조용히 이어폰을 꽂고 산책길에 나섰다. 이맘때면 걷는 일은 마음속 어둡게 자리한 감정들을 씻어내 주는 것 같아 유난히 좋다. 가방에 책들을 한가득 담고 집 앞 경사로를 천천히 올라간다. 책과 나무, 햇살이 함께 있는 공간인 동네 책쉼터에 닿는다. 작지만 아늑한 그 공간 이곳저곳에서 sns에 올릴 책 사진을 찍으며 혼자 뿌듯해한다. 사진만 찍고 내려오려고 했는데 그냥 가기 너무 아쉬운 날씨라 뒷산 한 바퀴 돌아볼까 하는 찰나,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걸 느끼는 순간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을 멈추고 바람 소리를 듣는다.
나뭇잎 가득 달린 나무들에서 푸르른 파도 소리를 내고, 어디선가 새가 지저귄다. 스치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귀에 닿는다. 운동화 밑창이 흙길을 힘차게 차는 발걸음, 맨발로 조심스레 걷는 듯한 무음의 발걸음, 그리고 천천히, 고이고이 흙을 밟아가는 나의 걸음은 다른 이들과 섞여 하나의 합주를 이루는 듯하다. 걷는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소리를 듣는 일이다.
걷다 보니 눈앞에 펼쳐진 색들이 눈에 들어온다. 쨍하고 촌스러운 진분홍 철쭉, 살짝 수줍은 듯 연분홍 철쭉, 그리고 눈부시게 하얀 철쭉들이 가득 피어 있고, 그 사이로 몽글몽글 샛노랗게 핀 작은 꽃들이 초록 잎과 어우러져 더욱 화사하게 빛난다. 자연은 매번 같은 계절을 다르게 보여주는 재주를 가졌다. 그래서 자연 앞에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 길을 걷는 중 일행과 함께 나온 이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조용히, 혼자 걷고 있지만 말 없는 고요 속에 오히려 더 많은 생각의 이야기가 피어난다.
한껏 기분이 좋아지니 같이 걷자고 하면 피곤한 몸을 이 끌고 될 수 있으면 같이 걸어주려는 남편과 가끔은 귀찮아하고 투정 부리지만, 막상 나서면 해맑게 웃으며 장난치고 폭풍 같은 수다를 떠는 두 아이들과 함께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걸 보거나 먹으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떠오른다는데 내게 그 사람들은 결국 가족인가 보다. 무엇보다 소중하고, 언제든 떠오르는, 나의 사람들.
천천히,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걷고 있는 지금 바람의 결, 햇살의 따스함, 꽃의 향기, 흙길의 감촉, 지나가는 사람들의 온기까지 느껴진다. 이 순간이야말로 '아보하'가 아닐까.
‘아보하’는 '아주 보통의 하루'의 줄임말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과 만족을 찾는 것, 나만의 속도로 삶을 즐기고 의미를 발견하는 것. 이 순간이 그렇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고, 말없이도 마음을 가득 채워주는 산책하는 이 순간.
자연에 깊이 스며들고, 잊고 있던 감각을 되찾으며,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에서 다시 불러오는 일. 오늘, 이렇게 걷는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금 사랑을 배우고, 감사함을 되새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큰 선물인지, 조용히 되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