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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완 Jun 27. 2023

누구보다 강한 그 사람들

<브런치 스토리 작가 신청 제출용>

동대입구역, 스크린도어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청년은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갑자기 앉는 어른, 살짝 열려있는 그의 가방에는 조촐하게 등산 스틱 한 짝만 있었다. 멋진 산을 정복하고 내려오던 길에 친구들과 우정을 쌓는다며 막걸리 좀 마셨으리라. 그는 어눌해진 말투로 휴대폰을 청년에게 들이밀며 전화 좀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한 할아버지의 목소리, 취한 어른의 친구란다.  전화를 대신 받자마자 정신이 멀쩡해 보이던 그 웃어른은 쓰러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이 친구인데 애가 많이 취해서 제가 데리러 가려고 합니다. 무슨 역입니까?" 친구는 동국대 앞 에스컬레이터로 오겠다고 했다. 통화가 끝나자  스크린도어 앞을 지나가던 백발의 한 할아버지가 쓰러진 어른을 보고 소리 질렀다. "내가 너보다 어른인 것 같은데, 앉아있어!", "안 일어나!" 쓰러진 어른은 죄송합니다. 제가 어지러워서만 반복했다. 한동안 시끄럽더니  역무원이  내려와 무전기를 손에 꽉 진채 소리 지르는 할아버지를 향해 지하철 왔으니 타고 가시라고 했다. 그는 이 방향으로 안 간다고 했다. 다른 방향이 오니 그것도 아니라고 하고 머뭇거리다 조용히 사라졌다. 하지만 역무원은 쓰러진 어른에게는 말을 건네지 않고 청년을 슬쩍 보고, 다시 역무실로 향했다.



 청년은 쓰러진 어른을 부축해서 출구로 나간다. 나가는 길에 또 교통비를 내게 될 청년은 잠시 멈칫했으리라, 삑 소리와 함께 나가는 교통비는 돈을 아끼고 있는 그에겐 두려울만했다. 청년은 옆을 흘깃하며 어른의 화면을 봤다. 거기엔 우대권이라고 적혀있었다.

 아까운 교통비는 뒤로하고 청년은 에스컬레이터에서 혹여 뒤로 넘어질까, 어른 가까이의 손잡이에 손을 얹혔고 출구를 나와, 출구 앞에 어른을 앉혔다. 바깥공기를 마신 어른은 정신을 좀 차렸는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몇 살이냐고 물어보셔 22살이라고 말하고, 대학 졸업할 때 됐네라고 하니,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왔다고 했다. 뭐? 다다음 주에 입대합니다. 공군으로요. 그렇게 시작되는 어른의 군대 이야기, 월남전 이야기는 막 입대를 준비하는 청년에겐 재밌게 들렸다. 그때의 살인의 기억은 어른의 눈시울을 붉게 했다. 격발에 적중했던 그 순간의 기억, 전쟁은 나쁘다고 말한다. 또 자기는 79세란다. 이것저것 말한 할아버지는 청년이 들고 있던 삼다수 물병을 뚫어져라 쳐다보셨다. "물 좀 드실래요?", 마시고 뱉고를 반복하셨다.



 몇 분 뒤 법인 택시가 왔고, 백발의 한 어른이 운전석에서 내려 청년에게 고개 숙이며 감사합니다를 반복했고, 할아버지는 내가 너를 기억해야 해, 내가 너를 기억해야 한다고 반복하며 옆에 그의 친구를 붙잡았다, 그의 친구는 택시 영수증과 볼펜을 건네며 전화번호를 부탁했다. 그 후 그는 친구를 뒷좌석에 태우고 신라호텔 앞 사거리를 지나 사라졌다. 장충동 일대에서 주말에도 택시를 하는 79세의 늙은 친구였다.

 청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어떤 할아버지였는데 택시 할아버지는 아니고, 쓰러진 사람의 친구라고 한다. 그가 그러기를 "저희가 형제처럼 여기는 친구인데 오늘 등산하고 술을 많이 마셔서 이렇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


쓰러진 어른은 자신의 몸을 맡길 사람을 찾으며, 낭떠러지 바로 위의 정신줄의 끝자락에 매달려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부탁을 들어주고, 가만히 앉아 통화를 이어가는 사람을 보고 안도하며 줄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땅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또 찾으러 오는 사람, 감사 인사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의 추락은 고요했다.


...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사람,

기꺼이 달려와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사람,

대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 주는 사람,

신뢰하고 나를 맡길 수 있는 사람들,

그 분야에서 가장 전문가인 선수들이 질서 있게 바통 터치하는 그 경기,

사랑은 누구보다 강한 그 한 사람이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이어지는 것이다.



                                                   


                                                                                                      2022.09.17 동대입구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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