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나기
스물세 살이요, 삼월이요, 각혈이다. 여섯 달 잘 기른 수염을 하루 면도칼로 다듬어 코밑에 다만 나비만큼 남겨가지고 약 한 제 지어 들고 B라는 신개지 한적한 온천으로 갔다. 게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내 아직 기를 펴지 못한 청춘이 약탕관을 붙들고 늘어져서는 날 살리라고 보채는 것은 어찌하는 수가 없다. 여관 한등 아래 밤이면 나는 늘 억울해했다.
-「봉별기」中
스물세 살, 삼월, 길을 가다가 문득 너무 부끄러워서 집으로 마구 달려온 적이 있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집으로 왔지만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 생활, 내 삶, 내 자신이 부끄러우니 도망칠 방법은 없다.
어쩌면 나의 청춘도 기를 펴고 한번 살아보고 싶은 건 아닐까. 밝고 행복해 보이는 그런 것들이 내 모습보단 청춘의 형상과 비슷할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살아야 할 이유도 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한심하게도 나는 청춘을 모른다. 그래 보자고 했던 시도들은 모두 변변치 못하게 끝났고, 밝고 행복하기는커녕 스스로조차 견디기도 어렵다. 영락없이 패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내가 도태된 인간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사회로부터 도태된, 살아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실격된 인간. 객관적으로 보아 그게 이제까지의 내 진짜 모습이었다고 말이다.
한동안 그런 글들만 끄적이다 이제 더 이상은 글을 못 쓰겠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다. 뭐든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껏 써온 글들을 처음부터 한번 읽어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내 삶이 이리 한심해졌는지 좀 알아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5년 전에 쓴 노트부터 모아놓고 읽다 보니 신기한 점이 하나 있었다. 시간은 꽤 흘렀지만, 내 글의 내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남에게 보일 글에는 그럴싸하게 희망을 주장하면서 정작 나의 글에 희망이라고는 적혀있지 않았다. 오히려 글들은 절망과 상실감 속으로만 계속해서 빠져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스로의 삶을 비교적 오랫동안, 다소 폭력적인 방식으로 혐오해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럼 왜 이렇게까지 나는 내 삶을 혐오했던 걸까. 무슨 이유로 희망을 잃고, 살아갈 의미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걸까. 다양한 이유는 있었지만, 종합해본 결과 그 주된 원인은 스스로의 삶을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데에 있어 보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바라던 일들은 하나도 이뤄내지 못했고, 절대 원하지 않았던 일들은 잘 일어났다. 몇 년간 그것이 반복되며 아무것도 남은 게 없고, 무엇도 바꿀 수 없다고, 그러니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들 속에서 살면 하루가 일 년처럼 무겁다. 그렇게 무력감을 학습하며 내 삶이 무가치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고 해서 그게 당신의 가치를 결정해버리는 건 아니라고 누군가 말해줬던 일이 있었다. 사실 그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 그리고 일어나는 일들,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이 아니면 무엇으로 내 가치가 결정되겠냐고 이제껏 전제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스스로의 삶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논거였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게 고작 그런 것들이 아니라는 점을 이미 나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그게 무엇이든 언젠가 지나갈 것이고, 살아있는 한 다른 내일은 찾아온다. 그런 변화의 속에서도 불변하는 가치를 만드는 게 있다면, 그건 오직 한 사람이 어떻게 의지하고 행동하는지일 것이다. 그게 한 인간이 바꿀 수 있는 전부이며, 그렇기에 그를 가치 있게 만드는 무엇이리라. 그러니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로 인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가치는 오직 내가 결정하고 또 지켜야 하는 무언가이다.
만약 이제까지 나의 가치를 결정하고 있던 게 나 자신이었다면, 스스로를 무가치하도록 만들고 있던 사람도 다름 아닌 나였다고 할 수 있을 거다. 어쩌면 무가치해 보이는 내 모습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를 삶의 피해자로 만들고 싶어서, 나는 절망과 자기 혐오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삶의 피해자는 일종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스스로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며 불쌍한 자신을 연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나를 지배해왔던 자기 혐오는 본질적으로 자기 연민과 동일한 말이었던 것이다. 사랑이 주체의 언어라면 연민은 주변자의 언어다. 인간은 무언가를 연민할 때 그 대상에 대한 책임 의식을 버릴 수 있다. 심지어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도 말이다. 스스로를 혐오한다는 것도 곧 스스로 삶의 주변자가 되어 자신의 가치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있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자기 혐오는 즉 자기 연민이다.
결국 내 눈과 귀를 막고 있었던 건 그 어떤 누구도 아니었다. 그건 그저 나였다. 그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으니 나의 글도 같은 자리에 멈춰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모든 일은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스스로를 혐오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것도, 스스로를 연민했던 것도,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었던 사람도 오직 나밖에는 없었다. 고로 내 눈과 귀를 다시 열고, 나를 일으킬 사람은 오직 나다.
스물세 살이요, 구월이요,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여전히 나고, 나의 세계도 역시 그대로이다. 지금까지의 내가 도태 인간이었다고 한들 틀린 말이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어딘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서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한들 그 안에서 작용하는 힘은 전혀 다르며, 따라서 그는 서 있는 사람과 전혀 다른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었다. 자기 혐오와 자기 연민이 같은 말이라는 걸 아는 나는 더 이상 내 삶의 피해자도, 주변자도 아니다. 이제 나는 내 삶의 주인이다.
내일은 또 다른 불행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좌절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제는 그 어떤 고통이 찾아와도 나라는 인간을 격하시킬 수 없다. 이제까지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게 나였다면, 그곳에서 나를 구할 수 있는 이도 오직 나다. 그것마저 모두 내 삶의 일부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구원을 받거나, 스스로를 완벽히 사랑할 수는 없을 거다. 그렇지만 그건 오늘부터, 그저 한 발자국씩 나아가면 그만이다. 늦었더라도 느리더라도 시작만 하면 된다. 그것이 결국 다시 일어나는 법이기에 말이다. 어쩌면 다시 일어나는 것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저 늘 그래 왔듯이, 내일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