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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타인

악인이 되는 법

by 리상

"지옥이란 바로 타인들"이라는 대사로 유명한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Huis Clos)>은 기존의 관념을 벗어나 새로운 모습의 지옥을 그려낸다. 사르트르의 지옥에는 유황이 끓거나 용암이 흐르지 않고, 악마나 심판관이 기다리고 있지 않으며, 이곳이 지옥이라는 확실한 보장마저 없다. 그저 죄를 저지른 세 명의 타인이 영원히 함께해야 하는 형태의 사후 세계라는 사실만 추측해볼 따름이다. 얼핏 보면 그렇게 나쁘지도 않은 상황처럼 보이지만, 세 명의 사람들은 서로에 의해 지옥의 의미를 실현하게 된다.


사르트르의 지옥에는 거울이 없어 화장을 고치고 싶다면 다른 이의 눈을 거울 삼아야 한다. 그 말은 즉, 스스로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을 보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타인의 눈은 나의 것과 같을 수 없다. 나와는 다른 그 눈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 차이로 인해 우리는 다른 시선과 생각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게 되고, 나아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나쁜 마음을 품지 않았어도 서로에게 폭력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닫힌 방>의 인물들처럼 타인과의 관계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는, 서로의 지옥인 셈이다.


사르트르는 지옥이라고 묘사했지만, 사실 이 작품은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갈 문도, 도망칠 곳도 없이 영원히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극의 등장 인물들은 현실의 우리와 닮아 있다. 서로의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도, 타인이라는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모습도 우리와 같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등장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이 지옥이라고 말하고 있을지 모른다.


정말 우리는 모두 지옥 속에 있는 걸까.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이 때론 지옥처럼 느껴지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타인에 대한 혐오와 그에 따른 갈등, 그것이 심해져서 생기는 범죄나 전쟁 같은 일들에 대한 소식은 매일매일 쏟아져나온다. 그런 큰 문제들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저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대해야 한다는 것만 해도 무척 피곤하고, 경우에 따라선 괴로운 일이다.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스스로의 지옥을 경험했을 것이다. 자신이 자초한 걸 수도 있지만, 살다보면 자신의 행동과는 별 상관 없이 안 좋은 일들이 찾아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잘 이겨내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나는 조금은 여러 번 지옥에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모든 상황이 내가 원하던 정 반대로 일어났다고 생각했을 때, 모두가 나를 혐오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 알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타인들의 사이에서 휘둘려야만 했을 때가 그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그 시간들은 어느 정도 지나갔지만 여전히 나는 그대로 나고,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한 명의 사람이다. 언제고 다시 지옥이 돌아온대도 이상할 건 없는 것이다. 그때의 내가 정말 객관적으로 지옥 같은 상황에 처했었는지, 그저 내가 너무 약했던 걸지는 모르겠지만 지옥을 생각할 때에는 내 스스로를 많이 잃게 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니 나는 지옥 속에서라도, 내 자신을 조금이라도 지킬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시간이 조금 흘러,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면 모두가 적이고 악인(惡人)이라고 생각했던 내 모습도 어느 정도 비합리적이었다는 판단을 내렸다. 몸과 마음이 버티지 못할 때 나는 모두를 적처럼 느꼈고, 항상 적의를 가지고 살았다. 물론 실제로 나를 혐오하고 미워했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곳이 어디였건 타인을 존중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내게 도움을 주려고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모두를 적이라고 생각했던 나 또한 항상 타인을 혐오하면서 살아왔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세상에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다는 쉬운 이야기도, 사람은 혐오할 만한 대상이 있어야 스스로를 혐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조금은 어려운 이야기도 해볼 수 있겠다. 어쨌거나 내가 악인(惡人)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랬듯 나도 다른 누군가를 혐오하면서 살아왔다면, 그들이 나에게 지옥 같았던 만큼 나도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악인(惡人)이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닫힌 방>의 인물들처럼, 나도 똑같은 부류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건 내가 아니었을까. 타인들이 지옥 같고 악(惡)하기보다도 내가 타인을 혐오하면서, 타인과 나의 삶까지 지옥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았나. 다른 이들을 악으로 치부하면서 정작 나부터 악인(惡人)이 되어가고 있지 않았나. 그게 사실이라면 실은 우리 모두가 지옥에 일조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사르트르도 그런 마음으로 이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결국 지옥을 만드는 주체가 되지 않기 위해, 악인(惡人)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하나 밖에 없어보인다. 그건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어, 타인과 내 스스로를 안아줄 수 있게 되는 것. 누가 악인이더라도, 누가 타인을 혐오하더라도 나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 나부터 지옥같은 타인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를 더더욱 지옥 속으로 끌려가지 않게끔 해줄 것이다.


때로 타인이 우리에게 행하는 폭력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서로의 타인이기 때문에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란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부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게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지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자신부터 지옥 같은 타인이 되지 않기 위해 행하는 악인의 노력이 결국 타인 뿐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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