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글은 살아있는 생명과도 같다.
오늘도 퇴고를 했지만, 내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글을 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쓴 글이 나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독자가 내 글을 읽고 위로, 감동, 깨우침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 이 세상의 모든 글은 결국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쓴다. 영어 학습서를 쓰는 저자든, 자기 계발서를 쓰는 저자든 모든 작가는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쓴다.
글쓰기의 고통은 삶의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도 같다. 하지만 이는 글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피아노 연주자, 가수, 과학자 모두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신을 알아간다. 글을 쓰면서 얻은 성장이 저자 주변으로 전파된다면, 그것은 이미 세상을 이롭게 한 것이나 다름없다.
내 글에는 그때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이 어떻게든 담겨 있다. 독자들은 그 글을 읽으며 함께 감정을 느낀다. 슬픈 날에 쓴 글을 다시 보면 '이때 이렇게까지 슬펐던가?' 싶기도 하고, 기쁨에 가득 차 있을 때 쓴 글을 보면 그때의 과했던 감정의 높이에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의 나를 돌아보며 느꼈던 감정은 그 자체로 큰 가치가 있다.
심지어, 내 글이 '구리다'라고 느껴지는 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다. 사고와 성장의 깊이가 달라져, 과거에 썼던 문장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글쓰기 실력이 늘어 문장의 어색함이 잘 보이니,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고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꾸준한 성장의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에 내 글이 구린 것은 당연한 이치이며, 꾸준히 글쓰기 능력이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내년 초에 나의 책이 출간될 예정이다. 흠... 솔직히 나는 내 책이 출간되면 모른 척하고 싶다. 누군가 내 책에 대한 안부를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책이 출간된 후 그것을 더 이상 '내가 쓴 책'으로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책과 나는 이미 분리되었고, 내 책은 내가 아니며, 나 또한 내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책은 그 책대로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새로 태어났다. 그 책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살아갈지는 온전히 책의 몫이다. (회피일까?^ ^)
나는 최선을 다했고, 내 책도 최선을 다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나와 내 책을 어떤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것이다. 칼 로저스의 '있는 그대로 존중'을 실천할 때이다. 모든 글은 살아있는 생명과도 같다. 그 생명을 보고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