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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Oct 18. 2024

소설은 가짜야

라는 개소리에 관하여

 “소설은 가짜야.”라는 말을 들은 순간, 되받아칠 말들이 입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소설이 가짜라 읽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째서 드라마만큼은 그렇게나 빠져들어 보는 건지, 영화관은 왜 그리도 자주 가는지. 과장과 거짓말 사이의 말들을 던지는 내가 가짜인지도 모른 채 바보같이 나를 좋아하는 당신은, 언제나 회색 눈을 한 채 회색 일상의 연속인 “진짜” 인생을 살고 있는데. 그래서 그 삶이 행복한지 묻고 싶다.


  물론 모두가 소설을 좋아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을 싫어한다.”와 “소설은 가짜다.”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소설이 가짜라고 단정 짓는 순간 그는 소설을 사랑하는 나에게 언젠가부터 꼭 드러내고 싶었던, 하지만 드러내선 안 되는 무례한 속내를 “가짜”라는 방패를 무기 삼아 드러낸 것이다. 소설을 읽는 것은  진정한 독서가 아니라는 무례하고 오만한 속마음. 이런 추측이야말로 오히려 더 오만하고 무례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상관없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흥분한 나머지 가장 사랑하는 한강 작가의 책을 빌려주겠다 제안한 나에게 “소설은 가짜야.“ 따위의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당신이라면 내가 무례한들 당신보다 더할까.


 그 말이 나에게 무례하고 오만하게 들리지 않으려면 그는 소설을 나보다도 더 많이 읽어보았어야 한다. 어떤 것을 가짜라고 단언하기 위해선 정말로 그것에 어떠한 진실도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보다도 훨씬 깊이 있게 대상을 들여다보고 파헤쳐봐야만 한다. 하지만 맹세코 소설은 가짜라고 확언하기 위해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보다 보면 절대 가짜가 아니란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소설을 가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설을 가짜라 말할 자격이 없다.


 나는 언제나 상처받은 마음에 대한 위로와 세상에 대한 혜안을 소설로부터 얻는다. 20대 중반에 처음 읽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지독할 정도로 머리를 어지럽히고 명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영혜라는 인물이 두려웠고 영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웠다. 30대가 되어 다시 읽은 <채식주의자>는 여전히 내 명치를 꽉 막히게 만들지만 종국엔 체기가 가시듯 가슴이 차갑게 내려앉게 만드는 작품이 되었다. 아직도 영혜를 이해할 순 없지만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육식을 거부하다 결국 자살 기도까지 하게 된 딸을 위해 한약이라 속여서까지 염소즙을 먹이려는 엄마의 사랑은 내가 삶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이름 모를 양가감정에 내가 받아들이기 용이한 이유들을 달아준다. 끝내 아예 모든 식사를 거부하는 영혜는 이러다 정말 죽는다며 다그치는 언니에게 “왜” 죽으면 안 되는지 오히려 되묻는다. 나 역시 계속해서 되묻는다. 영혜는 왜? 아버지는 왜? 망할 형부는 왜? 그리고 영혜는 왜. 내 삶에 궁금증이 없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영혜의 삶을 통해 자꾸 물음표를 띄우고 생각한다. 단 한 권의 책이 나를 이렇게 생생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데 소설이 어떻게 가짜일까.


나는 그가 언젠가 꼭 깨닫길 바란다. 소설은 진짜라고.

동시에 생각한다. 당신이 깨닫는 날이 과연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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