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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리하여 그러므로

비록 냉탕과 온탕을 오가더라도

by autumn dew

감사를 다녀왔고, 아주 오랜만에 보고서를 쓰게 되었다. 이곳에 쓰는 글과는 글의 결이 완전히 다른 감사보고서. 누군가는 내가 글 쓰는 일이 취미라고 하니, 그럼 감사실의 업무와 잘 맞겠다고 말했지만 내가 늘 써왔던 글과는 그 발상과 논리 자체가 다르니 사실 이 둘 사이를 오가는 일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느낌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리하여, 그러므로'

언젠가 우연히 머릿속에 떠올랐던 이 부사들을 한데 묶어놓고, 아무런 내용 없이 이곳에 제목으로만 저장해 두었다. 언젠가 이들을 가지고 글을 쓰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야 이 제목을 가지고 글을 쓴다. 오랜만에 보고서를 쓰려고 하다 보니, 저 순서야말로 내가 보고서에 담아야 하는 글의 순서였음을 알아차렸기에. 당신은 이런 태도와 행실을 취했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그렇게 해버렸고, 그리하여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려드리니, 그러므로 앞으로 이렇게 처리하시오-의 순서대로.


보고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일들이 한참이 지나 저 순서대로 기억된다면, 지금 나의 이 순간은 어느 시점으로 기록될까. 아직 그 어떤 부사를 덧붙이기에도 애매할 만큼 시작이 되지 않은 것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시간조차 언젠가는 어느 한 단락을 차지하는 일화가 되어 그 문장들이 상대를, 또는 스스로를 납득시킬만한 그럴싸한 조각들로 남길 바란다.



절기상 가을이 시작되면서, 한낮에는 여전히 덥지만 그래도 아침과 밤의 온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비만 오지 않으면 무조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선다. 동네 한 바퀴를 빙 도는, 한 시간 정도의 빠른 걷기. 한참 동안 걷다 보면 습한 날씨에 온몸에 땀이 흐르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버스정류장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마침 도착한 버스의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버스 안의 에어컨 바람이 훅하고 느껴질 때가 있다. 세상에, 이렇게나 시원하다니. 짧지만 강렬하다.




보고서와 에세이. 어떤 글이 나의 일상에 이런 서늘바람과 같은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답답한 보고서를 쓰다 다소 뽀송한 나의 이야기를 쓰는 일이 그것인지, 아니면 평범한 일상에 맞닥뜨린 다소 낮은 온도의 차가운 글이 그것인지.


한겨울에 따뜻한 실내에 있다 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나가게 될 때면,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라면을 끓일 때, 면발을 자꾸 들어서 찬 바람을 쐬게 해 주면 면발이 쫄깃해진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 내 몸도 쫄깃해진 게 아닐까 하는. 마찬가지로 여름에도 갑작스럽게 찬 공기를 맞게 될 때면 똑같이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지금 또 내 몸이 쫄깃해지겠군. 가끔씩 이렇게 나의 상상력이 평범하지 않다고 느낀다.


아무튼 그런 쫄깃함이 삶에도 적용된다면, 정말로 일상에서 자기 회복성과 탄력을 올려줄지도 모르니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글들을 이어서 써 내려가고자 한다. 해야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이 두 가지를 절로 오가게 해주니, 덕분에 굳이 그 방식을 찾을 필요가 없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의 글은 욕심보다는 그저 장면과 현상의 해상도를 높이기 위해 쓰는 글이었기에.

그리하여. 그저 해왔던 대로, 찾아내고 발견한 흐름에 맞춰 한 문장 한 문장씩 써 내려간다.

그러므로. 어떻게 되었든 매번 그럴싸한 마지막 온점을 찍고 다음 장으로 무탈히 넘어가고 싶다.


이 글 또한 마찬가지.

오래 묵혀둔 속 빈 제목에, 쫄깃한 일상의 한 페이지를 이렇게라도 채우게 되었으니 아주 다행이다. 또 이렇게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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