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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이별준비야

전파를 보내는 중입니다

by autumn dew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해에 어떻게든 학교의 혜택을 누려보고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국제교류원에서 주관하는 단기문화연수를 신청했다. 성적과 신청서를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해 중국에 가는 여정이었고 총 두 팀, 한 팀당 열명 정도 인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중국의 대학들과 함께 진행하는 연수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국 대학의 학생들도 한국에 일주일 정도 방문이 예정돼 있었다. 고심 끝에 지원서를 제출했고 다행히 합격해, 그해 여름 중국 서안을 다녀올 수 있었다.


우리보다 서안에 있는 학생들이 먼저 한국을 방문하는 일정이었기에, 우리는 그들을 맞이한 다음 다소 어색했지만 매 끼마다 식당과 문화유적지, 관광지에 이르기까지 인원을 나눠 동행했다. 여정 중에 중국 학생들이 쇼핑을 원할 적엔 계획에 없던 통역사 역할까지 해야 했다. 중국어라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게 전부니 중국어는 포기하고 부족한 영어와 바디랭귀지로 근근이 해낼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을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낸 뒤, 중국에서 다시 재회할 것을 기약하며 웃으며 헤어졌고 머지않아 이번엔 우리가 서안으로 떠났다.


그들과 만났던 일주일 사이 뭐 얼마나 대단한 정이 들었겠나 싶었지만, 우리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와 있는 그들을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두 번째 여정. 이번에는 그들이 우리의 통역사와 가이드 역할을 하며 서안의 곳곳을 함께 해줬다.


식당에 갈 때면 물컵이나 찻잔이 빈 적이 없었다. 중국은 손님이 음식을 남기는 것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정도로 잘 먹었다는 의미라 하여, 그들은 빈 접시나 빈 잔을 절대로 가만 보고 있지 않았다. 계속해서 접시에 음식을 채우고 빈 잔에 차를 따랐다. 음식을 남기는 것을 싫어하는 나에겐 조금 괴로운 일이기도 했지만 문화를 이해하고 나선 아까워도 남겨야만 했다. 야시장에선 절대 바가지를 쓰지 않도록 물건을 사고 싶으면 조용히 자기네들에게 먼저 말해달라고 했다. 알아서 흥정을 해줄 테니 절대 먼저 상인에게 가격을 묻지 말라며. 현지인과 같이 다니니 그렇게나 든든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한국에서 화장품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통역해 줬던 너의 피부타입은 건성이니 지성이니, 이 정도의 든든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게 무더웠던 여름의 일부를 생전 만날 거라 생각한 적 없던 타국의 또래들과 국경을 오가며 함께 보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날. 공항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언제 다시 만나자,라는 말도 돈이 있는 어른들이나 할 수 있는 얘기지. 취업을 앞둔 학생이 무슨 여유가 있어 당당하게 다시 만나자 할 수 있을까. 무슨 이산가족 상봉 후 다시 헤어지는 것 마냥 게이트를 통과하기 전까지 손을 꼭 잡고 겨우 울음을 달래며 헤어졌다. 당시 우리와 그들의 SNS나 메신저는 접속 가능한 플랫폼이 달라 연락을 주고받기도 쉽지 않았기에, 한국에 돌아와선 한동안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근황을 확인하 졸업 후의 삶을 응원했다. 지금은 모두 잘 살고 있으려나.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학생들이 그 짧은 시간만에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친해진 모습에 우리도 놀랐지만, 당시 우리를 인솔하던 교직원들도 적잖이 놀란 듯했다. 비행기에서는 부은 눈으로 잠이 들었고 그날 하루는 이별에 진탕 애를 쏟았다. 같이 걷고, 같이 먹는 정이란 그렇게나 무서운 것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남겨진 접시와 찻잔만큼의 정은 결코 적지 않은 양이던 듯.



사람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인사 전보철. 신입 시절엔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가뜩이나 어리벙벙한 사회초년생인데, 지금과 같은 직장 내 괴롭힘이란 말이 자리 잡기 전이라 고스란히 누군가의 횡포를 당해야만 했던 적도 있으니. 그때의 유일한 기대는 그 누군가와 언젠가 이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든, 그가 가든 이 조직에 있는 한 영원히 같이 일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 또한 잠시다, 여기며.


그러나 운 좋게도 나의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 이별은 나쁜 사람과도 하는 것이지만 좋은 사람과도 하는 일이었고 그럴수록 더욱 잦은 로 느껴지곤 했다. 그러나 이별로 인한 관계의 유한함은 지금의 관계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 주고, 로 인해 귀함을 깨닫게 한다. 다행히 다년간의 경험으로 인해 이제는 눈물 몸살이 나지도 않으며, 그저 애틋한 인간관계를 누군가와 새로이 맺었다는 행운과 안도감을 갖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별에 큰 품을 들이지 않으려 애쓰는 편.



윤종신의 [내일 할 일]이라는 노래 가사 중, '하루 종일 이별준비야.'라는 가사가 있다. 전보를 앞두고 떠나는 이들에게 전할 마음을 준비하고, 오고 가는 이들이 드나들 자리를 정리하며 주말 하루를 이별준비로 보냈다. 그래서인지 그 노래가 하루 종일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와 헤어지고 만나는 일은 나만 겪는 일이 아니다. 상대도 나와 헤어지고 만난다. 오늘은 이별 준비를, 머지않은 내일엔 만남을 준비해야지.



이 별,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만이 만남과 이별에 연연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제 곧 그간 같이 먹고 같이 걸었던 이들과 헤어진다. 역시나 이곳에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 속 쌓인 접시와 찻잔엔 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전파는 어디에든 가. 받아줄 사람만 있으면."

- 영화 [이 별에 필요한] 中 -


이별에 큰 품을 들이지 않아도 의미 있던 관계는 그 자리에 남는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종종 전파를 타고 가닿기도 하고. 그러니 받아줄 사람만 있으면 된다.


마지막 전파를 보내려 애썼던 주말.

방전되지 않게 배터리를 충전한다.

나도 누군가로부터 언제, 어디서 전파를 받게 될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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