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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SD카드

추억의 용량초과

by autumn dew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 아빠는 잘생긴 편이다. 부모가 팔이 안으로 굽어 다른 집 아이들보다 우리 아이가 예쁘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일까. 객관적인 판단이라 한들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기준 우리 아빠는 미남형이다. 미소년은 아니고 전형적인 미남형. 그래서인지 아빠는 대체로 사진이 잘 나오는 편이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주름이 깊어지고 머리카락은 줄어들었지만 그 선명한 이목구비만은 지금도 여전하다.


아빠는 그래서 사진 찍을 맛이 나는지 밖에 나가면 셀카봉으로 사진 찍는 일을 좋아한다. 우리 가족 중 가장 셀카모드를 잘 활용하는 편. 그리고 셀카를 찍기 위함이 아니더라도 꼭 셀카봉에 핸드폰을 연결해 기다란 봉을 펼쳐 이곳저곳의 풍경을 열심히 담아낸다. 어디 여행을 가서 숙소에 들어갔을 때도 혼자 여행 브이로그를 찍는 것마냥 동영상을 촬영하고 풍경 앞에선 파노라마 형태의 사진 잘 찍는다. 그리 좋은 핸드폰이 아님에도, 가끔 아빠가 찍은 사진들을 볼 때면 사진 실력이 예전에 비해 많이 확연히 나아졌음을 느낀다.



아빠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알려주면서, 주는 고기를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낚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주는 고기는 지금 뿐이지만 방법을 알면 혼자여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까. 하물며 생선 가시를 바르는 방법이나 과일 껍질을 잘 까는 방법까지도 아빠는 우리에게 꼭 알려주려고 했다. 방법이라기보다는 요령에 가까운. 그래서 지금도 부서 회식 때, 횟집에 가서 생선구이를 발라낼 때면 동료들에게 항상 박수를 받는다. 이건 다 아빠 덕분이다.


시간이 흘러 반대로 우리가 아빠에게 무언갈 알려줄 때에도 그는 나름대로 방법을 알려달라 하는 편이었다. 무턱대고 해달라고 하기보다는 간단한 일이라면 스스로 해보려고 하는 기본적인 배움의 자세(?)가 돼 있는 학생. 그중 아빠가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 핸드폰 갤러리의 폴더를 만들어 정리하는 일인데, 폴더를 만들어 사진을 분류하고 옮기는 것을 한 번 알려주고 나니 알아서 잘 활용한다. 그래서 늘 여행이나 나들이를 다녀올 때면 아빠는 날짜와 지명, 누구와 갔는지를 대충 알 수 있는 폴더명을 짓고 그 안에 사진을 옮겼다. 그러다 자꾸 용량이 늘어나다 보니 어느새 폴더로 분류된 추억의 사진들은 점점 SD카드에 보관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 결국 아빠의 핸드폰은 용량의 한계에 봉착했고 그는 나에게 SOS 요청을 했다. 본가에 자주 오지도 않으니 왔을 때 해결해야 했다. 대용량의 SD카드를 로켓배송으로 시켜 다음날 새 카드에 사진을 옮겼다. 엄마는 아빠가 회사에서도 쉬는 시간에 핸드폰의 갤러리를 살펴보는 일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진이 쌓일수록 흐뭇한 듯. 그래서 기존의 사진들도 계속 볼 수 있게 새로운 SD카드에 옮겨야 했는데, 하필 동생이 카드리더기를 갖고 간 바람에 번거롭게도 핸드폰을 노트북에 연결해 노트북에 사진을 복사하고 다시 핸드폰에 새 SD카드를 장착해 그리로 옮겨야 했다.


그러던 도중, 아빠가 만들어 놓은 폴더 이름을 보면서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지명에 오타가 있거나 통일성이 없는 날짜 표기방법. 옮기기 전에 티 나지 않게 하나하나 수정했다.(아마 아빠는 내가 어디를 수정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한참의 시간만에 마침내 사진을 모두 옮겼고, 넉넉해진 용량에 그는 흐뭇해했다. 엄마는 내가 사진을 옮기느라 바쁜데 애썼다 생각했는지, 아빠에겐 이제 인생 마지막 SD카드라 생각하고 아껴 쓰라고 했다.


출장에 나가있던 어느 날, 문득 노트북 안에 진을 옮기면서 복사해 둔 아빠의 사진들이 눈에 띄었다. 10년도 넘게 지난 사진부터 가장 최근의 사진까지. 아빠는 분명 딸이니 예쁘다 하고 찍었겠지만, 내 기준엔 흑역사 수준의 사진도 많았다. 다소 수평이 맞지 않는 것도, 흐릿하게 찍힌 것들도 있지만 사진 한 장 한 장에서 아빠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가 일하다 쉬는 시간에 핸드폰으로 지난 사진 보는 것을 즐긴다고 한 걸 보면, 역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산다는 은 맞는 말이다. 더군다나 나도 나이가 듦에 따라 종종 그 의 위력을 확인한다. 아빠의 추억 저장고 덕분에 나도 쉬는 시간, 추억에 잠겼다. 그의 추억 중 대부분은 나의 추억이기도 했으니.



엄마의 환갑 기념 여행으로 오랜만에 가족 여행을 떠났다. 아빠의 갤러리엔 또 얼마나 많은 사진들이 쌓였을까. 이번 여행 중에도 아빠는 역시 가장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넉넉한 용량만큼 마음껏 찍었으려나. 짧은 시간 동안 찍힌 여러 장의 사진들이 또 얼마나 그의 쉬는 시간에 쓰일 재료가 될까.




용량이 다 차면 더 큰 걸로 바꿔드릴 테니 당신께서는 마음 놓고 사진을 찍으셨으면. 아빠의 갤러리가 풍성하다는 건, 그만큼 아빠가 품고 있는 추억 자산이 많다는 거겠지. 아빠의 또 다른 양식이 풍부해졌다는 의미다.


무시할 수 없는 노년의 삶의 재료.

고작 그 곳간의 용량을 늘리는 일 정도를 귀찮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무한대라 하더라도. 추억엔 용량초과가 있을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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