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Summer, Helsinki, Finland
대학생 때 다녀온 유럽여행을 발판 삼아, 직장에 입사한 후 오랜만에 떠난 유럽이었다. 사실 핀란드를 택했던 것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동생과 둘이 떠나야 하니 여자가 가기에 안전한 여행지일 것, 가급적 직항이 있을 것, 그리고 여름이니 가급적 시원할 것. 그 모든 것을 충족하는 것이 핀란드였기에 큰 의미 없이 핀란드로 떠났다.
7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쌀쌀한 날씨였다. 한국에선 에어컨 바람이 센 실내에서나 걸쳤던 남방을 단추를 잠그고 입어야 할 만큼. 게다가 한국에서 '미세먼지'란 말이 날씨만큼 일상화되어 가던 시점에 그곳에서 마주하는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는 매일 감격스러웠다.
머무를수록 낮은 채도의 그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건물도, 사람도 무뚝뚝한 무채색의 느낌이었지만 오히려 덕분에 깨끗하고 맑은 도시의 풍경이나 각종 북유럽 풍의 디자인 제품들이 더 돋보이는 듯했다. 20대 때는 여행을 가기 전, 인터넷도 인터넷이지만 꼭 그 나라에 대한 설명이 담긴 가이드북을 샀었다. 핀란드는 북유럽으로 묶인 책의 카테코리 중 하나였던 걸로 봤을 때, 지금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그다지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명한 관광지처럼 다리가 아플 만큼 여기저기를 다닐 일은 없었다. 오히려 주로 쇼핑몰이나 공원을 돌아다니다 지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일부러 트램을 타고 도시를 몇 바퀴 돌곤 했다. 트램의 앞쪽, 기사님의 뒷자리에 앉으면 시티투어가 따로 없었다. 우리의 뒤편은 퇴근길 직장인들로 붐볐고 다소 부산스럽게 느껴졌지만 전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로 핀란드 사람들이 키가 컸기에 단지 그 부피로 인한 존재감이 느껴졌을 뿐, 역시나 무채색의 사람들인지라 아무런 불편함 없이 바깥 풍경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저 그 평온한 소란스러움이 좋았다.
여름휴가를 무사히 끝마치고 복귀했다. 하반기부터 새로운 업무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아직 휴가철이 끝나지 않은 탓에 곧바로 새 업무가 주어지지는 않았고 그 사이 옮긴 자리를 정리하며 한 주를 보냈다. 무사한 하루를 마치고 퇴근하고 사택으로 들어가는데 웬일인지 저녁 기온이 조금 떨어진 듯했다. 가끔씩 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꽤나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와중에 아파트 게시판에는 4일간 온수 배관 교체로 온수 공급이 중단된다는 게시물이 붙어있었다. 아, 하필 휴가 갔다 복귀한 이번 주에 이런 일이. 날씨가 아무리 더워도 찬물 샤워는 쉽지 않은데.
저녁을 먹은 뒤 어차피 찬물로 샤워해야 할 것이라면 산책을 하고 땀을 좀 흘리자 싶어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섰다. 한결 시원해진 날씨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덥다가 갑자기 상쾌한 공기를 맞이할 때면, 이제 10년이 다 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헬싱키에 첫 발을 내디뎠던 그해 여름이 떠오른다.
한여름이 오기 전 동네 이곳저곳을 돌며 미리 파악해 둔 산책 코스로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한 퇴근길의 차와 사람들. 더불어 나무에는 매미가 우렁차게 울고 있었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매미가 이리 열심히 우는 날이 매미의 생으로 따지면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니 다들 여름 동안 조금만 참아주자는 DJ의 멘트가 떠올랐다. 매미는 생에 가장 유난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만, 다행히 상쾌한 여름밤에 들었던 내 귀엔 평온한 소란스러움에 불과했다. 다행히 산책을 끝낸 뒤, 살짝 오른 체온 덕분에 찬물 샤워도 무리 없이 끝낼 수 있었다.
핀란드 여행의 마지막 날, 헬싱키의 어느 실내시장에서 나무 공예품을 파는 어느 가게를 지나가게 되었다. 가게의 주인이었던 아저씨는 가게의 모든 것을 자신의 아내가 만든 것이라고 자랑을 했다. 온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로 가득했지만, 아저씨의 눈빛에서 아내에 대한 사랑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내의 글귀들로 소란스러웠던 그곳의 평온함이 좋았다.
이어 해안가에 인접한 어느 카페를 찾았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한적하고 조용한 카페에서 저마다의 거리를 두고 앉은 사람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 바다를 마주 보고 앉은 노부부가 있었다. 이따금씩 몇 마디를 주고받긴 했지만 크게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모든 색을 품어줄 수 있는 무채색의 평온함에 이른 그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도시의 풍경도 풍경이거니와 여행의 마지막이 이런 장면들이라 핀란드에서의 시간이 지금껏 더욱 아련하게 기억되는 걸지도.
찬물로 샤워해야 했던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책을 나갔다. 덕분에 밤 산책의 재미를 얻게 되어, 앞으로도 별일이 없으면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설 참이다. 퇴근길의 부산과 매미의 소란 속에서도 이 시간이 가져다주는 평온함의 묘미를 알아버렸거든. 찬물을 품어보려 나갔던 시간이, 소란스러운 것들을 품어줄 수 있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각종 칸막이와 냉철한 표로 구분되는 직장인의 일상 속에서,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모두들 자기의 색을 찾아가기 바빴던 하루가 아니었던가. 유지하기엔 더더욱 버거웠던.
모든 걸 품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낮은 채도의 도시, 낮은 채도의 시간. 틈틈이 퇴근 후 무채색의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셀프 시티투어를 했던 트램에서의 시간처럼,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평온한 소란의 시간을 갖고 싶다. 각자의 색에 힘을 풀고, 주변의 어떤 거슬림도 품어주던 그해 여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