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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때 적어

있을 때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by autumn dew

고등학생 시절,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엔 좀 뭣하지만 나름대로 반 친구들이 인정하는 범생이에 속해있었다. 명문대를 노릴 만큼 대단히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냥 조용하고 묵묵히 공부하는 학생 중 한 사람 정도였달까. 생각해 보니, 그 나이 또래의 여학생들이 외모를 가꿀 때에도 나는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대학생이 되면 절로 살이 빠지고 예뻐질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미신을 기대한 채, 그저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며 힘들고 못생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야간자율학습이 의무였고, 나는 심자(심야자율학습) 반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학기 중엔 하교시간이 11시였다. 고등학교 2학년, 당시 담임선생님은 야자가 너무 힘들다는 반 아이들의 의견을 수렴해 한 달에 한 번이었는지 두 달에 한 번이었는지, 하루 정도 본인이 원하는 날 야자를 뺄 수 있는 찬스를 수 있게 해 주셨다. 무단으로 빠지지 말고 당당히 가라며.


아무튼, 내 기억에 나는 이 야자 안 하는 날 쿠폰(?)을 딱 한 번 사용했는데, 그렇게 귀한 날 한 일은 다름 아닌 친구들과 다 같이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일이었다. 떡볶이집은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였고 나름 유명한 곳이었다. 떡볶이 때문에 야자를 뺄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날은 무언가에 홀린 듯 오늘은 그 떡볶이집에 꼭 가자며, 우르르 선생님을 찾아가 야자를 빼겠다고 말씀드렸다. 이렇게 다 같이 야자를 빼고 어디 갈 거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떡볶이 먹으러 갈 건데요.'라는 답변이 돌아간 순간 선생님의 피식하며 어이없어하시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렇게 당당히 교문 밖을 나서 어둑어둑한 시간,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떡볶이 집으로 향하는데 묘한 즐거움이 느껴졌다.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당당하게 가는 거니 더욱 그랬던 걸지도. 지금 생각하니, 친한 동료들과 반차나 조퇴를 하고 맛집 가는 느낌과 비슷하려나. 그렇게 떡볶이집에 도착해 떡볶이를 맛있게 먹고 또 가족들에게도 맛 보여주고자 포장도 갔는데 집으로 돌아가던 버스 안에서 내 주변이 떡볶이와 만두 냄새로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기분 좋은 야반도주. 아, 도망가는 느낌은 아니었고 당당했으니 야반당주라고 해야 하나.




본가에 갈 계획이 없는 주말이었는데, 이번 주말엔 이전 근무지에서 같이 일했던 후배의 결혼식에 있어 2주 만에 본가로 내려왔다. 이제 날씨도 좀 괜찮아졌는데 이왕 간 김에 남은 시간 동안 무얼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찰나, 동생이 그 집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얼마 전, 동생은 동생의 친구와 떡볶이를 먹고 왔었고 그때 나는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군침이 돌았다. 모르는 맛보다 아는 맛, 그것도 너무 맛있다는 걸 알고 있는 음식의 먹방을 보는 일이 더 괴롭잖나. 돈을 주고서라도 대신 먹어주고 내가 그 맛을 느낄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마침내, 이번 주말. 엄마와 동생과 함께 랜만에 그곳의 떡볶이를 먹고 왔다. 멀리 발령받아 간 이후에는 한 번도 가보질 못했거늘. 주머니는 그때에 비하면 훨씬 무겁고 어른스러워졌지만, 이 떡볶이는 가격과 상관없이 야자 빼기 쿠폰을 써야 갈 수 있던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쉽게 먹을 수 없는 귀한 빨간 맛이다. 또 잊힐 만할 때쯤 찾아와야지.



이전에 근무하던 곳에선 처음 발령을 받고 한동안은 업무에 적응하느라 야근을 자주 했다. 그때에 야근을 하기 전에 저녁을 먹어야 하니 학교 주변에 밥집들을 많이 다녔는데, 언젠가부터 아파트 재개발로 인해 식당들이 하나씩 문을 닫았고 그러다 하나씩 건물까지 허물어지더니 이젠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장소가 소멸되면 추억도 소멸되는 걸까. 지나간 것들은 누군가 기억해 주는 한 추억 속에 살아있다고는 하지만, 바쁘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그 추억도 점점 더 흐릿해질 것이다. 그러다 그때를, 그곳을 함께 추억할 다른 누군가까지 사라지고 나면 그곳의 존재는 나 홀로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누군가의 인생 중 중요한 한 페이지 될 결혼식에 잠시 여, 그곳에서 옛 동료들을 만나 서로의 얼굴을 살피고 안부를 물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그 사이 그들의 눈에 내가 더 나이 들어 보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열심히 겉과 속을 한 뒤 길을 나섰다. 그렇게 또 지난날을 함께 이야기하며 그때의 내가 존재하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람들 속에 잠시 물들어있다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아쉬움을 남기지만 괜찮다. 아쉬움의 근원이 애정임을 알기에 이 아쉬운 감정을 애틋하게 여길 수 있다. 다만, 바라건대 언제든 갑작스레 찾아올지 모르는, 귀한 쿠폰사용일이나 돼야 만날 수 있는 날을 위해 모두 제 자리에 잘 있어주기를. 그 형체와 맛과 말과 다정함이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



모든 존재하던 것들은 비록 사라지더라도 기억해 주는 이가 있을 때까지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 혼자만의 증언일 때에는 조금 미약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 기억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이곳을 활용한다. 있을 때 잘하는 건 다소 부족할지언정, 있을 때 기록하는 건 할 수 있다. 그렇게 다른 누군가를 등장시키고 그들을 끌어들여서 기억에, 기록에 연루시킨다.


나의 소중한 시간에 연루된 이들이, 무사하여 귀한 기억의 증인으로 오래 남아주길 바란다. 그렇게 모두에게 다음에 이르기까지 무탈할 것을 당부하며 헤어졌다. 이렇게 아쉽게 헤어졌으니, 언젠가 다시금 아쉽게 만나 또 과거가 될 오늘을 이야기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나 또한 그렇게 누군가의 추억에, 오래 연루되어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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