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리는 자만이 만날 수 있는
매일 같이 듣는 라디오에선 하나둘씩 가을과 어울리는 곡들을 알려준다. 한참 동안 잊고 있던 곡들과 우연한 기회로 마주하면 여간 반갑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매일 하루에 하나씩 계절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수집한다. 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되는 곡도 곡이지만, 이들과 연결해 준 라디오가 더 기특하다. '가을에 어울리는 노래 알려 줘'라고 인공지능에 질문하여 답을 얻었다면 이런 재미는 없었을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 아주 오래전 좋아했던 곡들이 불현듯 소개된 순간, 그 반가움은 인공지능 DJ들이 줄 수 없는 즐거움이 아닐까. 제목으로 먼저 만나는 반가움보다 익숙한 전주와 멜로디를 통해 전해오는 반가움이 더 큰 법이니까. 이렇게 매일 하루에 하나씩 잊고 있던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곡들을 수집해서 출퇴근길, 저녁 운동에 BGM으로 활용한다.
살면서, 희한하게도 단 한 번도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다. 우연히 회사에서 마련해 준 사택이 아파트이기에 지금 처음으로 아파트에 살아보는 중이다. 그렇다고 신축은 아니고, 아주 오래 전인 80년대 후반에 지어진 대단지 아파트. 비록 세련된 요즘 아파트 같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심히 만족하고 있다.
이곳에서 살며, 처음으로 경비원 분들과 마주했다. 어릴 때, 친구집에 놀러 갈 때나 돼야 마주치곤 했던 분들. 이제는 경비원을 고용하지 않는 아파트가 많아 한동안 뵌 적 없는 분들인데,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오래돼서 그런지 여전히 경비원 분들이 계신다. '보안'이라는 키워드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는 연세이지만, 처음에 이사 왔을 때엔 분리수거일이나 공지에 대해 궁금한 게 있을 때 낯선 이웃들보다 경비원 분들께 여쭤보면 되니 그것 하나는 참 좋았다. 게다가 이전에 산업단지 안에 있는 기숙사에 살았는데, 이렇게 오래된 아파트여도 주거단지에 살게 되어 덜 서글프고, 덜 무서워진 것도 한시름 놓인다. 그리고 아파트에 살게 된 이후부터, 요리는 아니어도 조리까진 할 수 있게 되어 배달음식도 잘 안 시켜 먹게 되었다. 이러나저러나 어찌 됐든 안전하고, 안정된 삶이다. 기숙사에 비하면 궁궐이지.
대단지인 데다 여러 단지가 붙어있다 보니, 아파트 주변의 길은 명확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자주 헷갈리곤 했다. 이 길로 가면 그 가게가 나올 것 같았는데 한 블록을 더 가야 하고, 저 길로 가면 그리로 바로 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혀있기도 하고. 열심히 발품을 팔아야지만 자연스레 체득되는 일이라, 한동안은 주변을 산책한다는 생각으로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녔고 이제야 머릿속에 얕게나마 지도를 구축했다. 그렇게 지금의 산책 겸 운동 코스를 만들었고, 퇴근 후 별일이 없으면 편한 옷에 운동화를 갈아 신고 집밖으로 나선다.
처음엔 땀을 너무 많이 흘려 손수건을 이마에 동여매고 다녔었는데, 이제는 밤공기가 한결 선선해진 것이 손수건도 필요가 없어졌을뿐더러 아무리 피곤해도 집 밖을 나서지 않기엔 아까운 날씨다. 그렇게 저녁마다 길을 걷다 보면 최근엔 가로수 은행나무로 인해 인도에 떨어져 있는 옅은 주황색의 은행 열매를 자주 목격한다. 보일 때마다 밟지 않으려 요리조리 잘 피해 다녔는데, 가을이 다가올수록 더더욱 이 가을 지뢰의 양은 늘어나고 있다. 해도 점점 빨리 지는 탓에 어두워 바닥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은행나무가 많은 구간을 지날 때에는 속도를 낮추고 시선을 아래로 둔다.
유난히 바닥에 은행이 많이 떨어져 있는 날이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다음 날, 다시금 운동을 하느라 길을 지나며 보니 어제의 흔적들이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밟아 뭉개진 것도 있어 상당히 지저분했는데, 아파트의 인도 바닥엔 그런 흔적 하나 없이 마치 누가 물청소를 한 것처럼 하루만에 말끔해져 있었다. 그때 알았다.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들이 매일 이곳을 청소하고 계신다는 것을. 출근 때마다, 단지 곳곳의 바닥을 쓸며 미화원 역할까지 해내고 계신 그들을 자주 목격했었다. 그들의 작은 노고를 그렇게 늦은 밤이 되어서야 알아차렸다. 덕분에 계절을 누리는 일에 있어 불편한 발걸음과 불쾌한 냄새로부터 잠시 해방되었다는 것도. 띄엄띄엄 운동을 나왔더라면 그들의 활약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매일 가을을 누리려다 계절의 숨은 조연을 깨달았다.
퇴근 이후, 아파트 단지 안의 마트를 가는 일을 좋아한다. 출장이 잦아 요리를 해 먹을 순 없고, 주로 조리해서 먹으면 되는 음식들을 사는 편이다. 얼마 전부터 냉장조리 식품들의 매대가 미세하게 변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냉면과 쫄면들은 조금씩 사라지고 뜨듯한 우동과 칼국수들이 하나씩 늘어난다. 그래서 며칠 전 퇴근길엔 신상으로 등장한 가케우동 하나를 사 와서 해 먹었는데, 비가 왔던 날이라 몸이 으슬했는데 얼마나 맛있게 잘 먹었던지. 2인분을 사두길 잘했다.
어떤 날엔 좀 덥고, 어떤 날엔 좀 춥고. 날씨도, 마음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초가을. 그러나 가을이 왔음을, 그렇게 이 계절의 초입에 뒤처지지 않을 수 있도록 어디선가,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느낌이다. 보고, 듣고, 맛보는 것들에 있어 알게 모르게 그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가는 짧은 가을의 도중. 이러다간 또 타이밍을 놓쳐 트렌치코트를 얼마 입지 못할 것만 같다. 비가 내리고 나면 날씨는 또 급변화를 맞으니까. 짧은 가을을 만끽하려면 가을을 애써서라도 느껴야 한다. 다만, 그 와중에 가을날을 만끽하며 어떤 조연들의 도움을 받아 이 계절이 풍성해졌는지도 잊지 말아야지. 숨은 조연들의 수고를 당연한 듯 여기지 않고 틈틈이 발견해야지. 이 정도면, 매일 같이 흘려보내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작지만 분명한 역할이 있는 조연에 가까우니.
그러다 내가 누군가의 가을에 숨은 조연이 된다면 그것도 참 좋을 것 같은데, 그건 방법이 있으려나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