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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놓친 개념을 찾아드립니다

또 감사하러 갑니다

by autumn dew

'과장님, 내일 중으로 이의신청서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여느 때처럼 이의신청서가 올 수도 있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연락을 받고 나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내가 내려보낸 감사 보고서에 대해 피감인의 억울한 호소가 담긴 이의신청서. 새로운 사실이 없어 고민할 여지없이 통보서를 작성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막상 이의신청서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계속 마음이 불편하다. 반박할 수 없는 이야기면 어쩌지. 내가 간과한 것이 있으면 어쩌지. 공문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신경이 쓰인다.


연휴를 보내러 본가에 오기 전, 이틀 간의 출장일정이 있었고 그 일정 직전의 일이 이의신청서에 대한 심의 결과 통보서를 쓰는 일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이의신청서에는 새로운 사실이 없었고 나는 감정 섞인 주장을 감사기간 중 확인한 것들로 반박하며 그의 이의신청서를 기각하였다.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미안하지만 기존의 보고서에 오류가 없음을 확인한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일주일에 가까운 연휴를 보내면서, 내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를 자주 잊었다. 중대한 역할이 없는, 쓸모가 없는 나날의 연속. 하루하루 시간이 가는 것이 아까우면서도, 내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를 틈틈이 떠올려야 했다. 와중에 그간 불규칙했던 수면패턴이 본가에 온 지 3일 정도가 지나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할머니처럼 새벽에 일찍 눈이 떠지던 습관은 어디로 가고, 여기서는 늦잠이란 걸 잘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통잠을 자고 나니, 개운하면서도 다시 예전의 불규칙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싫어진다.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 가물가물한 것과 별개로 규칙적인 수면패턴을 찾아가고 있었기에, 무엇이 나에게 옳은 것인지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았다.



몇 주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운동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길을 걷는데 저 멀리서 어떤 아저씨가 목줄을 한 강아지와 함께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의 강아지는 길게 늘어뜨린 목줄 너머 가로수와 흙의 냄새를 맡고 있었고, 아저씨는 마침 지나던 휴대폰 가게의 유리에 붙어있는 광고문구를 읽는 듯 보였다. 아저씨가 광고문을 읽느라 여념이 없어 보이는 사이, 갑자기 그의 강아지는 큰일을 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끝난 녀석의 볼일. 나의 발걸음은 점점 아저씨와 가까워지고 있었고, 속으로는 '아저씨, 제발 녀석의 흔적을 확인하시고 치워주세요.'하고 조용히 외치고 있었다. 가뜩이나 동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사실 그 옆을 지나는 일도 조심스러운 사람인지라.


애석하게도 아저씨는 녀석의 흔적을 확인하지 못했고 아무 일이 없었다는 둥 다시금 녀석의 목줄을 끌어 가던 길을 가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뒤에서 오고 있던 청년이 아저씨에게 조심스레 인기척을 했다. 청년은 아무 말없이 그저 손으로 녀석의 흔적을 가리키며 아저씨에게 눈빛을 보냈다. 댁의 강아지의 흔적은 치우고 가던 길을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긴 눈빛. 아저씨는 후다닥 주머니에서 비닐을 꺼내 녀석의 흔적을 치웠고, 청년은 그 모습을 확인한 뒤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안도와 함께 나도 그의 옆을 지나갔다.


누군가가 범할 뻔한 실수를 나지막이 막아준 그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분이 나보다는 감사 업무를 더 잘할 것 같아. 나라면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까. 나라면 강아지의 주인에게 저렇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누군가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용기가 필요한 나보다는, 저렇게 주저 없이 큰 소리 내지 않고 계도할 수 있는 그가 내심 존경스러웠다. 분명 그 청년이 나보다는 감사 업무를 더 잘할 것이라는 확신과 더불어, 그에게 알 수 없는 고마움마저 느껴졌다.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 잊고 있었던 연휴였지만, 평소보다 많이 먹고 덜 움직인 것이 신경 쓰여 시간적 여유가 있는 저녁엔 집 근처 공원에 나가 열심히 걷고 뛰었다. 기존에 꾸준히 하던 것 중에 하나라도 해야 다시 원래의 자리에 돌아가도 적응에 애를 덜 먹지 않을까 싶어서. 본가에서 지낼 때도 밤마다 운동을 하러 나갔던 공원이었다. 오랜만에 찾은 공원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고, 익숙한 듯 낯선 길을 오가며 게을러지고 싶은 마음을 다잡았다.




공원을 오가다 보면 역시나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들을 보며 문득 그날의 그 청년이 떠올랐다. 그 어떤 불쾌한 감정표현 없이, 묵묵히 누군가가 놓친 개념을 가리키던 손끝과 무언의 눈빛. 그의 정확하면서 불쾌함이 없던 지적엔 이의신청이 없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도 사건을 관망할 수밖에 없던 누군가에겐 고마운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조금 더 용기를 내야 하는 일. 긴 연휴가 끝났고, 나는 다시 어딘가로 감사를 하러 떠나왔다.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인지 잊고 있는 것만 같던 어느 밤. 하던 것 중에 하나라도 하자 싶어 나섰던 저녁 운동에서, 우연히 그가 떠올랐다. 당분간 그간의 관성에서 또다시 벗어나기 위해 조금 불편한 일상을 보내겠지만, 용기를 내자. 기운을 차리자.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나 같은 누군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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