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분에 대한 미련과 오만
평소에 5리터짜리의 쓰레기봉투를 쓴다. 적은 용량이지만, 혼자 사는 데다 출장이 많다 보니 이마저도 가득 채워 버리기란 쉽지 않다. 길었던 추석 연휴의 전부터 연휴 이후까지 연이어 출장이 있었고, 장기간의 부재를 앞두고 집을 정리해야 했다. 쓰레기 정리는 물론이거니와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짧은 음식을 우선적으로 먹고, 화분에는 물을 듬뿍 줘야 했다. 쓰레기봉투는 아직 여분의 용량이 남아 있었지만 이를 놔두고 갈 순 없으니, 봉투의 끝 부분을 동여매고 다소 헐거운 봉투를 내다 버렸다. 떠나기 전, 차는 청사의 지하 주차장 가장 안전한 구석자리에 주차해 뒀고 혹시 모를 방전을 대비해 블랙박스의 전원도 뽑아뒀다. 3주에 가까운 부재였다.
연휴가 길기도 길었지만 앞뒤로 연이어 있던 외지생활에 조금은 넌덜머리가 났다. 이럴 내 마음을 예상해 애착인형을 캐리어에 넣어 녀석을 데리고 왔고 연휴 때에는 집에서, 출장지에서는 숙소에서 인형을 껴안으며 위안을 얻곤 했다. 연휴 동안 푹 쉬고 떠나왔다고 했지만, 일주일 내내 비가 오는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누군가의 허물을 캐물어야 하는 감사의 일이 유난히 버겁게만 느껴졌다. 이런 것 좀 안 보고 살면 안 되나. 모르고 싶다. 모르고 싶다.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싶지 않다. 비밀이면 나에게도 비밀이었으면 좋겠다고. 가뜩이나 지치는데 업무를 마치고 저녁을 먹을 때마다 응원인지 잔소리인지 모를 선배의 조언도 버겁게만 들렸다.
길었던 출장을 마치고 청사에 도착해 캐리어를 차에 싣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운전석에 앉았다. 블랙박스에 전원을 꽂고, 오래 운행을 하지 않은 차에게도 적응시간을 주기 위해 시동을 걸고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브레이크를 풀고 운전을 시작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것도, 오래 운전을 하지 않았음에도 다시 운전석에 앉아 자연스레 운전대를 잡게 되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시작할 수 없을까. 몸에 자연스레 배어있는 기술처럼. 이미 체화되어 두렵지 않은 마음으로. 남들은 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은데. 외지에서 매일 새로운 사람을 마주해야 하는 것도, 잠자리가 수시로 바뀌는 것도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는데 엘리베이터 두 개 중 하나에 전원이 꺼져있었다. 알고 보니, 전기 점검으로 인해 당일 중 몇 시간 정도 정전이 된다고 공지사항이 붙어있었고 다행히 내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정전은 종료된 듯했다. 집을 오래 비우니, 이런 공지에도 뒤쳐진다. 전에는 아파트 관리비를 제때 내지 못해 다음 달 관리비에 추가금액이 더 붙기도 했는데. 아무튼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고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가 끝나자마자 라면을 끓여 늦은 점심을 먹고 잠시 바닥에 누워 쉬었다. 이틀 후면 또 출장지로 가야 한다. 가기 싫다. 또다시 낯선 사람과 만나기 싫다, 생각하며.
이틀 동안은 또 집에서 쉬며 머물러야 하니 그 사이 빈 냉장고를 며칠 분이라도 채우기 위해 잠시 나가 장을 봤다. 장 봐온 것들을 풀고 정리하다 보니 또 쓰레기가 나온다. 고작 이틀의 짧은 시간에도 이렇게 쓰레기가 발생한다. 살면 나오는 것이다. 기간이 길고 적고가 아니다. 그냥 사니까 나오는 것이다. 이 쓰레기들이란 것은. 그러니 나의 이 감정쓰레기들도 당연한 것이다. 하루를 떠나고, 이틀을 떠나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니까 나오는 것이다. 그냥 사니까.
그러나 나는 내 감정의 쓰레기통의 용량은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걸까. 아직 여유분이 남아있으니 조금 더 넣어도 되지 않을까, 하고 묵힌 불쾌함들을 어딘가에 처박아둔 채 가득 채워 버릴 수 있을 때까지 참고 쟁여둔 건 아닐까. 내 감정의 쓰레기통은 어디까지가 한계일까. 글을 쓰고 나면서부터 그 용량을 줄여 자주 비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0리터짜리를 쓰다가 5리터짜리 봉투로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다 채워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나의 쓰레기처럼, 작은 용량이니까 더더욱 끝까지 채워 버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 불쾌한 감정들을 끌어안고 살고 있던 것은 아닐는지.
출장지에서 돌아온 늦은 밤, 우연히 예전에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과의 단톡방에 누군가 화두를 던지며 오랜만에 대화가 시작됐다. 나의 안부를 묻는 그들에게 출장지에서 함께했던 애착인형의 사진을 보여주며, 녀석을 데리고 다니며 위안을 얻고 있다고 했다. 귀여워하는 듯 안쓰러워하는 대화가 끝날 무렵. 그들 중 엄마 뻘인 과장님이 대뜸 나에게 개인 톡으로 차와 빵을 같이 먹을 수 있는 기프티콘을 보내며 응원을 건넸다.
'가을, 추워진다. 우리 이쁜 딸내미!! 힘내!!'
예쁜 것만 봐도 시원찮을 나이에 험한 것들만 보고 있어 안쓰럽다며, 옆에 있었으면 차를 몇 잔을 사줬어도 사줬을 텐데 이걸로 대신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잠들기 직전이었는데 쓸데없이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는 걸 보니 이렇게 우중충한 날씨에 갖고 돌아다녔던 감정의 쓰레기통을 비워야 할 때였던 듯싶다. 덜 채워진 것 같아 꾸역꾸역 채우려 했던,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여기며 쓰레기를 갖고 있었던 건 나의 오만이었다. 그래서 괜찮다 말하지 않고 힘들었다고, 버거웠다고 여기에 적어둔다.
덕분에 험한 것들을 훌훌 버리고 잠에 들었다. 아침까지 늦잠을 잤으니, 아주 잘 자버린 것이다. 또 이렇게 비워도 살아있으니, 살아갈 테니 쓰레기는 나올 테지. 그냥 사니까 나오는 것이다. 감정의 쓰레기도. 그러나 묵혀두지 말자. 조금 덜 채워졌더라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기를.
그렇게 나는 쓰레기통을 비우고 또다시 다음 출장지로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