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하고 확실하게
그런 날이 있다.
유난히 온 세상이 날 시험에 들게 하는 것만 같은 날. 그게 또 하루라면 모를까 며칠에 걸쳐질 때에는 어른이 되면서 감당해야 할 일의 양이 늘어난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해야지만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 출장 중에도 출장 업무뿐만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일이 있었다. 가뜩이나 이런 일만으로도 버겁고 부담스러운데,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동안 접촉사고가 났다. 상대는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트럭 운전자. 그는 선배와 내가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주차돼 있던 내 차를 뒤에서 들이받았다.
다행히 선배가 있어 꼬장꼬장한 어른과 대응이 가능했지, 아니었으면 그는 나에게 잘못을 덮어씌울 요량으로 보였다. 사고를 일으키고 차주인 나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은 것도 이상했는데, 우리가 차에 도착했을 때 트럭 안엔 아무도 없었고 앞유리엔 전화번호도 비치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차를 빼지 않고 접촉된 곳을 사진 찍고 있을 때 슬그머니 나타나더니, 자신의 트럭은 우리가 오기 전부터 주차돼 있었는데 왜 자기 차를 박았냐는 식이었다. 엄연히 내 차에 트럭의 파란색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데도.
선배가 어이없다는 식으로 강경하게 대응해 줬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는 멀리 감치 우리를 지켜보면서, 혹시나 뒤 범퍼를 발견하지 못하고 우리가 떠날 수도 있는 데다 자기도 이제 막 와서 발견한 것처럼 연기를 하며 외려 피해자 행세를 할 것처럼 보였다. 보험사를 불러 대응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자신은 보험사를 부를 생각이 없으며 사고를 아내가 알게 되는 게 이래저래 피곤하니 현금으로 합의해 주겠다고 했다. 사이드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살짝 잠에 들었다 깼는데 그 사이에 차를 박은 것 같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보험사를 불렀고 끝내 부르지 않은 그의 보험사를 대신해 나의 보험사 측은 그의 이름과 연락처를 수집해 갔다.
다음 조사가 예정돼 있었기에 보험사 직원을 기다리는 동안 면담 약속을 연기시켰고, 이러나저러나 대인 사고가 없고 내 과실이 있는 것은 아니니,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겸허히 받아들이려 해도 출장지에서부터 돌아오는 길까지, 계속 순탄치 않은 일들이 일어나니 절로 한탄이 뿜어져 나왔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걸까요, 하고.
원거리 거주에 출장이 잦다 보니 기차를 자주 탄다. 대개 당일 출장이 아닌 데다 본가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기에 짐이 간소하지가 않다. 짐을 오르내리기도 쉽고 잠든 옆사람을 깨울 필요도 없는 통로 자리에 주로 앉는다. 이것도 여행처럼 드문 일이어야 창밖을 보는 일이 즐겁지, 전국을 일주하다시피 다니다 보면 창밖을 보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낭만적이지가 않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최근엔 경부선 연착이 잦아져 기차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얼마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차를 타고 있었고 객차 안에서 어느 남학생을 보았다.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이었는데 자신이 예매한 자리에 누군가 앉아있어 어쩌지 못하고 당황해했다.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데 말씨까지 어눌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러다 지나가던 승무원이 그를 발견했고 그에게 도움을 주려 그의 승차권을 확인했을 때, 그가 실제로 예매한 열차가 아닌 다른 열차에 탑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즘엔 연착이 많다 보니, 다음 열차가 먼저 미리 플랫폼에 도착하는 경우도 있어 잘 보고 타야 하거늘.
이 열차가 아니라는 승무원의 말에, 남학생이 대뜸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망할!"
수줍어하고 당황하던 모습과 달리 너무나 큰 목소리로 망했다는 말을 외쳐, 객차 안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다. 그때 그를 응대하고 있던 승무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망하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자신을 따라오라며, 그를 데리고 나갔다. 나였다면. 고객의 저런 말에 또 다른 고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어떻게 말했을까. 그의 말은 못 들은 척하고 도와드릴 테니 따라오라고만 말하지 않았을까. '괜찮아요' 보다는 상대의 말을 바로잡으며 '망하지 않았어요'하고 고객을 달래는 그녀의 차분함과 카리스마가 내심 존경스러웠다.
휴게소의 사고 이후, 선배와 다시 면담장소로 향하던 도중에 왜 이렇게 버거운 일들이 쏟아지는지, 어른이 되려고 이러는 거라면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툴툴거렸다. 그날 오후까지 나에겐 막연한 일들이 꽤 남아있었다. 나를 대신하여 트럭 운전수와 대적해 준 그는 오히려 시큰둥하게 얘기했다.
"액땜했다 생각해."
무덤덤하게 건넨 위로였지만, 생각해 보니 그의 말대로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가뜩이나 버거운 와중에 험한 일이 하나 더 추가됐다고만 생각했지. 그의 말을 듣고나서부터 이 정도의 사고라면 기꺼이 감당할 테니, 이 사고가 오후에 남아있는 막막한 일들의 액땜이 되길 바랐다.
망했다고 말했던 기차 안의 남학생도, 스스로의 착오에 대한 자괴감으로 무의식적으로 그 말을 외치지 않았을까. 이미 엎질러진 일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누군가 이렇게 고민의 여지없는 무덤덤한 한마디 말로 상대를 구해주니 얼마나 다행인지.
나의 엉망으로 가득 찬 그날들도 그렇게 지나갔고, 나 또한 망하지 않았다. 더 남은 엉망의 양이 있어 설령 또 찾아오더라도 앞으로도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망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만 크고 싶은데 자꾸만 어른이 되라고 예고에 없는 과제를 던져주니 성가실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