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약을 챙깁니다
먼 곳으로 떠난 여행지에선 좀처럼 쉽게 아프지 않은 편이다. 여행을 가기 일주일 전부터 가급적 자극적인 음식은 먹지 않으려 하고, 무얼 먹어도 꼭꼭 씹어 먹으려고 한다. 몸을 사리는 것이다. 몸을 사린다는 핑계로 몸에겐 더 큰 긴장감을 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늘 여행을 앞두고 일주일 정도는 먹는 것부터 운동에까지 무리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니 여행지에서는 대체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늘 다녀온 이후였지. 긴장이 풀려버리면 예상에 없던 잔고장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017년 여름, 덴마크와 스웨덴을 여행하던 중 나는 여행의 절반 이상을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다. 장시간의 비행 후, 숙소에 도착해 여장을 푼 바로 다음 날. 눈을 뜬 순간부터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은 두통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아팠던지 머리카락을 묶는 일도 힘들었다. 한국에서 챙겨간 두통약이 있어 몇 알 먹고 나면 오늘만 이러고 말겠지 했지만, 두통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한국의 한여름에 떠난 북유럽이었고 갑작스러운 온도 차 때문이었는지, 이렇게나 오래 잔두통을 앓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결국 덴마크에서의 마지막 날, 가져간 두통약을 다 소진했다. 약이 없으니 불안해졌다. 이러다 더 심해지면 어쩌지.
스웨덴으로 이동하여 스톡홀름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약국에 가는 일이었다. 해외의 약국에선 유명하다는 화장품만 사봤지, 진짜로 약을 사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가뜩이나 알아듣기 힘든 언어의 장벽 앞에서 약사도 동양인 손님은 낯설었는지 선뜻 약을 권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다 복용하고 비어버린 한국산 두통약 상자까지 챙겨가 약사에게 보여주며, 지속적으로 나의 두통을 어필했다. headache! headache! 찡그린 표정에 머리를 가리키는 바디랭귀지를 써가며, 겨우 두통약을 샀다. 새로이 도착한 나라에서의 첫 소비가 약이라니. 그러거나 말거나 이젠 제발 남은 여행을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두통이 멈춰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행히 그 간절함이 통했는지 약을 먹고 이틀 정도 만에 두통은 사라졌다. 현지에서 얻은 병은 현지의 것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나.
그렇게 스웨덴에서 복용하고 남은 약은 한국에 온 후에도 상비약으로 들고 다니며, 두통이 올 때마다 복용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누군가는 영어도 아닌 이상한 말로 뒤덮인 약상자를 보며, 영양제를 보듯 기념품을 사 온 거냐 물어봤지만 그럴 리가. 여행 중에 사 먹다 남은 두통약이라고 말하며 기념품을 전리품으로 전락시키곤 했다.
대학생 때부터 늘 진통제를 가지고 다녔다. 언제 찾아올지 모를 통증을 대비해 약을 갖고 다녀야 마음이 편했다. 주변의 친구나 동료들이 아파할 때에도 척척 하나씩 건네줄 수도 있고. 그래서인지, 약이 다 떨어져 갈 때는 불안했다. 그래서 어디든 생활 반경 안의 약국의 위치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약이 떨어지면 가야 하니까. 최대한 빨리 나의 이상(異常)을 잠재우고 싶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평화로운 주말 아침, 눈을 뜨자마자 알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 오랜만의 두통이었다. 몸을 일으켜 재빨리 두통약을 찾았다. 편의점에서 산 약이라 성분 함량이 적어서인지 약을 먹어도 통증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침을 먹은 뒤, 약국에서 산 다른 진통제까지 먹었다. 누워있으면 머리가 더 아플까 싶어 앉아서 책을 좀 읽으려고 했거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누워버렸는데 그 김에 잠이 들어 오전 시간을 통으로 다시 자버렸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눈이 떠졌고 다행히 그 사이 두통은 가신 듯했다. 두통이시여, 쉬는 날이란 걸 알고 이렇게 찾아오셨나요. 그건 그래도 고맙네요.
두통약을 꺼내 먹은 김에 다음 주의 출장을 앞두고 남아있는 상비약을 정리하다 보니, 약의 출처가 다양하다. 감기약은 강원도의 어디에서 샀고, 눈밑이 떨려서 샀던 이 약은 경기도의 어디에서 샀고. 전국에서 사 모은 약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겠지. 홍길동처럼 출장 다니고 있는 나에게, 지금도 약은 다른 의미의 전리품이다.
편의점에서 산 약도, 사실은 약을 사러 갔던 게 아니라 현금이 필요해 5만 원 권을 쪼갤 겸 무언갈 사려하다 편의점에서 사게 된 약이었다. 생각해 보니, 편의점의 수많은 맛있는 간식들을 제쳐두고 그때에 나는 두통약과 소화제를 샀다. 온갖 맛있는 것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지독한 셀프 보건교사가 아닌가.
날 것 그대로 앓을 수 있었던 주말의 두통마저 지금은 다행처럼 느껴진다. 다음 주, 다시금 출장을 앞두고 짐을 꾸리며 남은 약을 챙겼다. 혹시나 다 떨어져 부족한 약은 현지에서 조달할 참이다. 언제 어디서든 온전하고 싶다. 물론 이젠 어디서 사든, 어떤 약이든 Made in Korea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현지에서 아플 땐 현지의 약을 먹으면 금방 낫지 않을까 하는 믿음을 유지한다. 그나저나 지난날의 수많은 나는 얼마나 이렇게 괜찮아 보이려, 괜찮아지려 했던 것일까. 약들이 전리품이자 동시에 일종의 의복처럼 느껴진다. 흉한 것을 재빨리 덮어야 하는, 잠재워야 하는 한 겹의 옷 같은 느낌. 아, 그렇다면 이건 위장약이 아닐까. 위장을 달래는 약이 아니고, 위장(僞裝)하는 약.
다른 사람들의 가방에도 각자의 위장약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모두 괜찮아 보이려, 그리고 끝내 괜찮아지려 애쓴다. 세상은 내 상태를 고려해주지 않고 내일도 내 자리에 내가 무난히 등장할 것이란 기대를 세우니까. 그러니 그 항상성에 부응하고자 내일도 표정을 다듬고 애써서 길을 나서야지.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야무지게 위장약을 챙겨서.
모두의 위장약이 적재적소에 제 역할을 잘해주었으면 좋겠다. 비록 플라세보 효과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