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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리더라도 묻히지는 않기를

핸드크림 듬뿍 바르기

by autumn dew

턱받이를 해야 하나.

요즘 음식을 먹다가 뭘 그렇게 자꾸 흘리는지. 음식물은 비누보다 세제에 더 잘 지워지기 때문에 낡은 칫솔에 주방 세제를 묻혀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운다. 최근 들어 몇 번이나 이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떨 때는 맑은 국물이 묻어 식당에서는 물티슈로 대충 닦고 세탁기에 돌려서 빨면 지워지겠지, 하고 세탁을 했거늘 다 말리고 나니 오히려 이상한 색으로 얼룩이 남아 결국 다시 세제 솔질을 해야 했다. 번거롭게 왜 이러니. 뭘 이렇게 자꾸 흘리니.


식당에 가서도 옷의 색과 관계없이 가급적이면 앞치마를 착용한다. 이젠 나의 조심성을 믿을 수 없다. 요즘엔 틈만 나면 흘리는 데다 수저도 종종 떨어뜨린다. 음료를 엎어 식탁 위를 닦느라 바쁜 적도 많다.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아기들의 잡기반사처럼 어른들의 놓기 반사가 시작되는 건가 싶다. 손끝의 야무짐이 예전 같지 않다.




얼마 전, 사내 워크숍에서 올해 입사한 까마득한 후배들을 만났다. 나와는 12년 정도의 차이가 나니, 그들이 나를 불편해하고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나 감사실에 근무하고 있다 하니 더더욱. 와중에 한 친구가 나의 첫 발령지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그가 살고 있는 사택의 호실이 내가 살던 호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래전 내가 사들인 보일러와 냉장고, TV가 여태껏 이어져 그 친구까지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어린 후배는 신기해하며 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고, 그 사이 그 호실에 머물다 간 이들이 꽤 있었을 텐데 누구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갔다는 사실에 이 인사를 고맙게 받아야 하는 건지 미안해야 하는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만으로 스물셋의 나이에 그 허름한 아파트에 들어갔으나, 젊고 호기로웠기에 지냈지 다시 그곳으로 발령이 난다고 해도 그곳에 거주할 생각은 없다. 처음 호실을 배정받았을 때엔 기름보일러에 온수도,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아 사비를 들여 새로운 보일러를 장만했지만 낡은 아파트인 데다 그 정도의 용량과 기름만으로는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이겨낼 수 없었다. 워크숍에서 만난 후배는 아직은 지낼 만하다고 말했지만, 점점 추워지는 날씨를 생각하면 그 어린 친구가 심히 걱정이 된다.


한편으로는 참 고마운 사회초년생의 보금자리기도 했으나, 그곳에서 남몰래 흘린 눈물도 꽤 많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들 웃지만, 른 곳으로 발령이 나 마지막으로 사택을 정리하고 나오는 날. 나는 옛 영화 '동감'에서처럼 거실과 방의 벽지를 쓸며 잘 있으라고, 고마웠다고 인사를 건네며 울었다. 혼자 살아서 좋은 점이 혼자 몰래 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곳이었달까. 가족에게도, 동료들에게도 들키지 않고 혼자 마음껏 울 수 있 공간이 있다는 점이 좋았다. '좋았다'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의 냉동실엔 숟가락이 자주 들어가 있었고, 전날 운 탓에 눈이 퉁퉁 부을 때면 아침마다 숟가락을 에 갖다 대 출근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 집에선 참 많은 눈물을 흘렸고, 만큼 집안 곳곳에 눈물 묻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울었고 그러니 수습도, 후회도 필요치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안쓰럽다가도 한편으론 잘한 일이라 여긴다. 애먼 사람까지 끌어들여 이 눈물에 물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약한 모습은 나만 기억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가급적 내 감정을 묻히지 않으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애쓴다.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내가 AI가 아닌 이상 감정이란 자고로 흘러내리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니, 흘리되 가급적 어딘가에 그리고 누군가에게 묻히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즘 들어 더 자주 흘리는 게 문제인 것 같지만.




흘리는 건 잘만 흘리면 수습이 가능하지만, 묻히는 건 잘못하면 번거로워진다. 색을 빼내기란 쉽지 않으니. 밥을 먹을 때에도 가급적 당겨 앉허리를 숙인다. 흘리기 쉬운 나이라는 변명은 하더라도, 잘 묻히는 나이이고 싶진 않다.


날씨가 쌀쌀해지고 더욱 푸석해진 손은 자꾸만 무언가를 놓치고 흘리게 한다. 한껏 서글퍼지고 서늘해지는 계절. 야무지지 못한 이 손이, 그리고 약해지기 쉬운 이 마음이 행여나 미끄러지지 않도록 핸드크림을 듬뿍 바른다. 에도, 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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