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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底意)의 사도들과 마주하며

홍시의 도리

by autumn dew

지난주, 친한 후배가 부모님이 농사지으신 대봉감을 선물로 보내겠다고 했다. 이 얼마나 감사한지고. 때마침 그 주 주말 본가에 내려가기로 되어있었고, 그 무겁고 많은 걸 사택으로 받는다 한들 혼자 다 먹지 못할 테 본가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본가에 있을 때, 참하기가 이를 데 없던 감들을 무사히 택배로 받았다. 받은 감들은 소분하여 가족들이 먹을 것들을 남겨두고, 내가 먹을 것들은 다시 작은 박스에 담아 편의점 택배로 부쳤다. 이제 택배를 받을 사람이 올라가야. 감보다 내가 먼저 도착했지만, 다음 주엔 출장이 없을 테니 내근하는 동안 받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웬걸. 월요일 출근과 동시에 수요일부터 3일간의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게다가어 화요일 오후에 미리 내려가야 는 곳으로. 하는 수 없이 곧 도착할 택배는 아파트 경비실에 맡겨야겠다 생각했다. 이 와중에 아파트 분리수거일이 화요일이었는데 지난 출장 때문에 한 주 밀려버린 분리수거를 또 한 주 더 미룰 순 없어, 화요일 아침 출근길엔 거북이 백팩을 메고 동시에 분리수거도 내놓아야 했다. 짐과 쓰레기가 동시에 몸을 짓눌렀다. 감사실에 발령 났을 때, 이렇게까지 예측불가능한 삶을 예측하지 않았는데. 작심삼일은 무슨. 3일은커녕 하루살이도 나보다는 계획적이겠다.




그렇게 도착한 출장지에서는 조사를 진행하며, 내내 쓸데없는 질문에 시달렸다. 조사 내용과는 관계가 없었으나, 사건의 배경과 전말을 생각하면 쉬이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한 목적의 정의(正義)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줄곧 이 질문이 머릿속을 괴롭혔지만 이에 답을 내리고 싶지도 그렇다고 타인의 의견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일은 논리를 가지고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사실 논리에 앞서 도리를 중시하는 사람인지라 이 부서의 업무가 내 성격과는 맞지 않는 업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피해자이거나 때로는 정의의 사도다. 그러다 가끔은 정의의 사도인양 분한 그들의 악한 저의를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가 주장하는 정의에 도리적으로는 동조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논리적으로는 동조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때, 그 결과에 때론 씁쓸해진다. 그가 주장하는 정의에 내가 하는 일이 수단으로 사용되는 느낌. 차라리 내가 좀 건조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면 나았을까. 아니, 드라마들의 흔한 클리셰인 권선징악처럼 이후에 내가 모르는 다른 결말이 예정되어 있다면. 쓸데없는 상상만 늘어간다.



3일간의 조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경비실을 방문해 그새 도착한 대봉감을 찾았다. 창고에 보관돼 있던 감은 날이 차서인지 다행히 여전히 단단했고, 홍시가 되려면 아직 먼 듯했다. 두 개는 거실에 내어놓고 나머지는 비교적 서늘한 세탁실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맞이한 주말. 이북리더기에 저장해 둔지 한참된 천선란 작가의 SF소설 <천 개의 파랑>을 마침내 다 읽었다. 출간된 지 한참이나 된 책을 이제야.


예전에 사용하던 이북리더기에 이 책을 저장해 두었는데 오래된 이북리더기였던지라 호환성 제공이 만료되면서 앞부분만 읽고 멈춰버린 상태였다. 그러다 얼마 전 적금을 탄 기념으로 새 이북리더기를 사면서 책장에 담아둔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한 결말에 새삼스레 눈물이 났다. 세상에 내가 휴머노이드 로봇의 다정함에 눈물까지 흘리다니. 책을 읽고 눈물이 나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로봇 기수(騎手) 콜리와 경주마 투데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로봇처럼 건조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일상에서, 논리보다 도리를 따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동했던 걸까.


"저는 팀이라는 게 그렇다고 생각해요. 물론 투데이는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저는 감정이 없지만 100마리의 말이 바다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저는 투데이를 구할 거예요. 바다에 빠진 모든 말을 결국에는 구하겠지만 가장 먼저 구하는 거요. 그건 아낀다는 뜻이래요."

"그런 건 어디서 알았어?"

"보경과 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요. 거기서 바다에 빠지면 누구를 가장 먼저 구할 거냐는 질문이 나왔어요. 그게 소중한 사람의 순위를 매길 때 사용되던데…. 그런데 참 이상한 비유예요. 왜 꼭 절망의 상황에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요?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누구에게 먼저 줄 거냐는 비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그러게. 왜 우리는 그런 극한의 상황을 가정해 답을 구하려 하는 걸까. 절박한 상황을 가정하지 않으면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 걸까. 진실로 닥쳐 올 현실이 아니라 가정인데도. 로봇 콜리의 논리에 나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자주 마주하는 정의 아닌, 저의의 사도들도 그들이 문제 삼고자 하는 현실과 때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자주 극한의 상황으로 가정했다. 그래야만 논리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일까. 그 논리라면, 행위의 과오를 바로잡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해하려는 의도여도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고 봐야 하나. 그가 말하는 극한의 상황은 가정임에도. 여전히 답을 내릴 수 없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홍시를 참 좋아하셨다. 달달하고 말랑하기도 한 것이 씹을 것도 없이 꿀떡 넘어간다고. 대학 시절 만났던 필리핀 유학생 친구는 한국에서 먹은 과일 중에 감이 가장 신기하고 맛있다고 했다. 열대지방에선 먹을 수 없는 데다 아삭한 식감의 단감으로도, 푸딩 같은 홍시로도 먹는 것이 신기하다며. 시간이 지나 떫은맛을 잃고 말랑해지는 것도 모자라, 달달해지기까지 하는 것.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아삭함을 잃고 조금 물러지더라도 떫은맛은 온데간데없이 그간 응축해 놓은 다디단 다정함을 발휘하며 살 수 있다면.



날이 쌀쌀해지면서 체감온도도 떨어졌다. 아파트 주변을 에워싸던 은행나무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았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은 온도를 올려 따뜻해질까. 아니면 낮은 온도에 맞물려 차가워질까. 나 또한 어찌 이 계절에 적응해 갈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나는 그저 선물 받은 대봉감이 말랑해지는 것, 그리고 이제는 낙엽 걱정 없이 나무 밑에 마음 편히 주차를 할 수 있게 된 것. 이것들만을 생각하려 한다. 머리 아픈 논리보다는 그저 시간에 따라 당연해지는 계절의 이치, 그 도리만을.



거실에는 할머니와 찍은 사진이 있다.

나는 그 사진 옆에 단단한 두 개를 놔두었다.

왠지 이러면 홍시를 좋아하고 다정했던 할머니를 닮아,이 더 빨리 익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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