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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된 시간 속에서 好된 것

짧아질 겨울을 시작하며

by autumn dew

요즘은 퇴근 후 씻고 누워 조금이라도 책이나 핸드폰을 보려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쏟아진다. 아, 아직 잠들기엔 이른데. 며칠 전 어느 밤에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뒤늦게 자정이 넘어 깨서는 불을 끄고 다시 누워야 했다.


겨울마다 이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생각해 보니 오래전 신입 시절의 어느 겨울에도 나는 이렇게 일찌감치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그땐 퇴근하고 운동을 다녀온 뒤, 얼굴에 팩을 붙이고 매일 밤 드라마를 골라가며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그해 겨울, 나는 드라마 '상속자들'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드라마가 시작하는 10시 전에 자꾸만 잠에 든다는 것이었다. 본방사수를 지향했기에 행여나 놓칠세라 드라마가 방영하는 날엔 드라마 시작 시간에 맞춰 알람을 맞춰놓고 쉬었다. 그렇게 자주 졸다 깨 몽롱한 상태로 드라마를 봤고, 드라마가 끝난 뒤엔 잠이 달아난 건 아닌가 하는 걱정과는 달리 늘 무리 없이 다시 에 들 했다. 젊어서 그랬나.




외지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이다. 아, 처음 발령받았던 것이 1월이었으니 그렇게 따지면 세 번째 겨울일 수도 있겠다. 따뜻한 남쪽나라와 달리 북쪽의 겨울은 늘 쉽지 않았다. 눈 구경하기 힘든 대구에 살았는데, 인천에서는 차 위에 쌓인 눈을 치우는 일이 일상이었다. 게다가 기온은 또 얼마나 낮은지. 혹독한 겨울, 혹독한 외지생활. 겨울은 나의 외지생활과 닮아있다. 여전히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종종 눈이 나린다. 그것도 무거운 습설이. 별 수 있나. 오롯이 맞아야지.


이전 근무지와 지금의 감사실 생활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내가 품어야 하는 비밀이 많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대나무숲처럼 살았기에 나에게 고충을 털어놓는 이들이 많아 그들의 이야기를 품어주는 일이 벅찼는데, 여기에서도 나는 또 다른 성격의 비밀을 품는다. 그러나 이곳은 자물쇠로 꽁꽁 잠긴 비밀의 방이라고나 할까. 대나무숲이든 비밀의 방이든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스스로를 단속해야 한다. 사실 나는 대나무숲 해설사가 되는 것도, 비밀의 방 문지기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고 모르고만 싶은데, 지금도 방은 늘어나고 있고 꼭 쥐고 있는 주먹을 펼쳐 자꾸만 손에 열쇠를 쥐어준다.


그럼에도 굳이 달라진 점을 꼽자면, 예전보다 회사에서 조금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제는 누구든 함부로 나에게 고충을 털어놓지도, 소문에 대해 묻지도 않는다. 물론 나 역시 쉬이 들어주거나, 답해줄 생각도 없다. 권위적이라고 비난할 일이 아니라, 이곳에서는 그래야만 하니까. 비밀의 방 문지기가 되면서 자연스레 대나무숲 해설가는 실직한 것 같다. 모두에게 개방된 숲인양 무턱대고 찾아와 자기 할 말만 털어놓는 이들은 없어졌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무례한 이가 줄었다. 다만, 이제는 자꾸만 늘어나는 비밀의 방 앞을 꿋꿋이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 다소 가혹하다. 러나 문지기의 겨울이 호젓하고 적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곳에 근무하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 홀로 사색하는 시간이 늘었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는 필요에 맞춰 귀를 기울이고 나머지 시간은 나에게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자꾸만 새벽에 깨던 습관이, 한껏 어두워진 계절과 함께 절로 사라졌다. 이제는 출근일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힘들 정도. 알람소리에 맞춰 눈을 뜨고 커튼을 걷으면, 여름과 달리 온 사방은 아직 깜깜한 밤 같다. 창밖을 보며, '이번 주말엔 늦잠 자야지.'라는 말을 아침마다 되뇌었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는 말하던 대로 늦잠을 잤다. 통잠을 자서 그런가 몸이 개운했다. 가뜩이나 잦은 출장에 잠자리가 자주 바뀌어 틈틈이 나를 괴롭히던 불면의 밤은, 늦게 떠오르는 해와 따듯한 전기장판, 촉촉한 가습기가 치료해 주었다. 겨울이 혹독한 것만은 아니다. 일은 여전히 벅차지만, 잠은 푹 잘 수 있다. 퇴근 이후의 시간들이 더욱 아늑해졌다. 외로울 겨를이 없다.




얼마 전, 핸드폰을 만지다 무심코 AI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걸까? 벌써 연말이야.


AI는 '정말 공감해요. 벌써 연말이라니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껴지시죠.' 하며,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껴지는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해 줬다. 그 이유들 중 이미 알고 있던 것도 있었으나, 새로운 것도 있었다.


[ 비율 관점의 변화 (대수 비례 함수) ]

프랑스 철학자 폴 자네(Paul Janet)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1년의 길이는 이미 살아온 기간에 대한 비율로 결정된다고 해요.

예를 들어, 10살에게 1년은 인생의 1/10이지만, 50살에게 1년은 인생의 1/50에 불과해서 상대적으로 짧게 느껴집니다.


오. 정말 그렇겠다, 이해가 되면서도 이 논리라면 앞으로 살면 살수록 1년이 더 짧게 느껴질 것이란 생각에 슬퍼졌다. 그렇게 따지면 이제 막 시작된 이 겨울도 작년보다 더 짧게 느껴지지 않려나. 그러니 이 겨울잠 시즌도 얼마 못 누릴지 모른다. 안팎으로 혹독한 계절이어도 각각의 숨은 장점이 있으니 마음껏 만끽해야지.



또다시 떠나온 출장. 늘 숙소는 출장지와 가까운 곳으로 예약하기에 출장 중에는 내근할 때보다 아침 시간에 여유가 있다. 다행히 조금 더 잘 수 있다. 달력은 한 장 밖에 남지 않았고, 살면 살수록 이 겨울도 짧게 느껴질 것이다. 가속도가 붙을 시간 속에서, 별 것 아니지만 별 것 같은 장점을 발견해 기록하고 놓치지 않으려 한다.


아기들이 잠투정 없이 잘 자면, 어른들은 칭찬을 한다. 자주 불면의 밤에 시달리는 어른들도 때론 잘 잔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고 싶다. 별 것 아닌 올 겨울의 할 일은 '잘 자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리고 편안히. 가급적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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