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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제웅 Apr 17. 2022

고통을 견디는 최대치

자산시장을 바라보며

 고통을 느끼는 역치는 운동선수와 더불어 일반인도 차이가 없다는 견해가 많다. 쉽게 말해 바늘로 어느 정도 깊이로 찌르면 단련된 운동선수더라도 똑같이 고통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고통을 최대로 견디는 정도는 어떠할까? 이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과학 잡지로부터가 아니다.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경제체력과 관련된 기사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2006년 미국 기준금리는 5%를 넘기고 피크를 친 이후로 기준금리는 3%를 넘긴 적이 없다. 2008년 리 만사 태이 후로 2016년까지 미국은 제로금리 시대였다. 이후 조금 올리긴 했지만 금세 코로나 여파로 사실상 제로금리시대로 회귀했다.


 경제기사를 보면 올해 FED는 2%대로 기준금리를 올린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실제 국채금리도 이를 반영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도 주식시장은 꽤나 긴 조정기를 겪고 있다. 경체가 침체된다고 얘기하는 이들이 많다. 무엇이 문제일까? 사실 2%대 금리는 코로나 전으로 회귀하는 수준밖에 되질 않는다.


 이제 우리 경제체력은 1%대의 기준금리만으로도 휘청거릴 정도로 고통을 견디는 최대치가 낮아졌다. 주담대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시장을 경고하는 기사가 매일같이 쏟아진다. 2006년의 5%대 기준금리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고작 16년 전의 일이다.


 미국의 최대 호황기로 여겨지는 2차 세계대전 이후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도 참전한 군인들을 대상으로 없다시피 한 금리로 집을 구매하게 하고, 생활자금을 빌려주었다. 소비의 미국이 이때 탄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때와 비슷한 모습이 살짝은 겹쳐 보인다.


 '최대로 견디는 정도'가 계속 낮아지는 게 비단 자산시장뿐일까 생각이 된다. 사람도 나이가 들며 더 큰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지는 게 아닐까. 청년기를 지나며 사람의 생산성은 줄곧 줄어든다. 창의적인 생각도 줄어만 간다. 고통이 시작되는 역치는 나이가 들면서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최대로 견디는 정도는 늘 낮아지는 게 아닐까? 나이가 들며 보수적으로 바뀐다는 게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니체의 주장이다. 스트레스가 만든 코르티솔 호르몬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조금 더 생산적으로 만든다. 다만 그런 호르몬의 효과는 내성이 있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더 이상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 둔해진다. 많은 스트레스를 겪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고, 더 배우길 거부하는 내 모습을 보며 생각이 들었다. 이 틀을 깨야한다.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겪던 시기도 지났다. 매우 평온하다. 그렇기에 생산적이지 못한 내 모습은 늘 고통스럽다. '최대로 견디는 정도를 더 높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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