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적 인식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는 차별과 다양성이 주는 아픔들을 중학생의 아들과 저자의 시선으로 잘 녹여낸 에세이이다. 다양성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차별은 안된다. 차별은 나쁜 것. 각자 다양성을 모두 존중받아야 마땅한 사회. 오로지 인식의 개선만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일까?
차별과 다양성이 대부분의 에피소드로 나오는 이 책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는다. 정치적 올바름을 계속해서 인식하고 상대방의 지뢰를 터트리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순 없다. 물론 이러한 방법으로 조금 더 따뜻한 사회가 될 수 있다. 다만 앞으로도 저자와 그 아들이 겪은 차별적 발언들이 쉽게 사라질 것 같진 않다.
윤리적 인식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늘 발전해왔다. 18세기 영국에서 처음으로 노예가 해방된 때도 그러하다. 현대 사회에서 노예제도는 상상할 수 없다. 가까이는 10년 전 삼겹살집에서 밥을 먹으며 담배를 피우던 때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최근에는 대형 카페의 경우 환경보호의 명목으로 커피를 재활용 컵에 담아주지 않는가? 우린 늘 과거보다 윤리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 다만 이러한 인식의 변화에는 기술의 발전이 숨어있다.
18세기 영국에서 처음 노예가 해방된 것은 산업혁명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고 주장하는 미래학자가 있다. <무엇이 옳은가>를 쓴 ‘후안 엔리케스’이다. 증기기관의 석탄이 노예보다 싸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노예를 해방시켰다고 말이다. 노예제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노예 해방을 만든 것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에 따른 경제논리였다고 말한다.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편의점에서 비닐봉지를 구매할 때를 생각해보자. 만약 비닐봉지보다 값싸고 더 친환경적인 봉투가 있다면 우린 당연하게도 친환경봉투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봉투는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만약 값싼 친환경봉투가 있음에도 비닐봉지를 선택하는 사람은 윤리적으로 뒤처진 사람으로 치부될 것이다.
먼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현재 개발 중인 기술들이 있다. 예를 들면 인공자궁과 같은 기술이다. 시험관 시술의 경우 외부에서 수정된 수정란을 엄마의 몸에 다시 주사한다. 하지만 인공자궁의 경우 수정란을 그대로 외부에 착상시켜 태아를 기를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이 보편화된다면 아이의 부모가 여성만 둘인 경우도, 남성만 둘인 경우도. 혹은 더 다양한 경우라도 쉽게 납득 가능해진다.
또한 유전자 편집기술로 사람의 몸 색깔을 태어날 때 결정할 수 있다면 어떠할까? 간단한 시술로 빨간색 피부색으로, 파란색 피부색으로, 성인이 된 후에도 피부색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떠할까? 그만큼 기술이 발전한 때에 피부색은 차별적인 요소가 아니라 단순히 개성을 나타내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누구나 흰색, 검은색, 노란색 피부를 개성적으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인식의 개선이 빠를까 혹은 이러한 기술의 개발, 보편화가 빠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