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미니멀리스트
라면을 끓였다. 아뿔싸 내게 젓가락이 없었다.
룸메이트가 방을 나가고 나서 내가 식기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나무젓가락을 얻어왔어야 했는데! 라면을 이미 두 개나 끓였는데! 급하게 서랍을 뒤졌다. 플라스틱 일회용 숟가락이 있었다. 휴 다행이다. 이거라도 사용해야지. 라면이 붇기 전에 먹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아니 근데 숟가락으로는 라면 면발이 잘 떠지지가 않았다. 숟가락에 기름만 묻어나고 흘러내려 먹을 수가 없다. 인내해야 한다. 괜히 국물을 떠먹었다. 젓가락으로 먹을 땐 국물을 먹으려면 양은 냄비를 통째로 들어 올려야 했지만 숟가락으론 간편하다. 오히려 좋다. 휘어가는 작은 숟가락으로 점점 면발을 집을 수 있게 되었다. 면발이 불어서인가, 없던 손재주가 생긴 건가 싶다. 국물과 면발을 한 번에 호로록 먹는다. 어디선가 라면은 영양학적으로 훌륭한 음식이라고 했다. 국물에 나트륨만 많을 뿐 괜찮다고 했다. 먹고 나서 물 많이 마셔야지. 그러한들 어떠한가. 국물을 떠먹는 흰 국물 라면도 있으니까. 조화롭게 먹으니 더 좋다. 나를 잠깐 속인다. 아니다. 속여지지가 않는다! 너무 불편하다! 쇠젓가락을 사야겠다. 손가락이 저려온다. 태어나서 안 쓰던 근육을 쓰는 거 같다. 별 별거에 노력을 다 하고 있다. 사실 젓가락질도 어른답게 잘 못해서 가끔 손가락이 저린데, 이왕 사는 거 교정용 젓가락을 사야 하나 싶다.
나는 자칭 미니멀리스트이다. 불필요한 물건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가끔 방에 화분 몇 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렇지만 숟가락으로 라면을 먹는 건 미니멀리스트가 아니다. 꼭 필요한 물건은 있어야 한다.
이건 자연인에 더 가까운 삶인 거 같다. 좋게 포장하고 싶다. 어느 스님은 모든 것을 비워야 비로소 가득하다고 했다. 그래 내 방은 가득하다. 쿠팡에서 사서 마신 2L짜리 빈 생수병도 줄 서있다. 만약 홍수로 내 방이 잠긴다면 저것들을 꼭 껴안고 탈출해야겠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모아두는 것이다. 집안일이 귀찮아서 혹은 내가 게을러서 치우지 않은 게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얼른 젓가락 사야지. 설거지거리가 하나 늘어나겠네. 귀찮다.
젓가락 한 짝을 인터넷에서 잘 팔지 않았다. 난 한 짝만 있으면 되는데. 거참 박하다. 젓가락 한 짝 내 방에 없다는 게 어이가 없다. 한 짝에 만원이나 하네. 만원이면 내가 좋아하는 엔초 아이스크림 30개를 사 먹을 텐데. 고민스럽다. 아니다 난 자연인이 아니다. 더 이상 이런 미친 생각을 그만두어야 한다. 젓가락 한 짝만 주문한다. 휴 근래 최고의 소비였다. 좋게 포장하려 해도 짠내 나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