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칫솔 세 개와 모텔비 아끼려던 남자

by 리친년

[들어가며]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 인생이 너무 파란만장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AI(제미나이)에게 나를 인터뷰해 달라고 부탁했다.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200개의 질문을 내놓았다. 그런데 질문들이 하나같이 뼈를 때리다 못해 순살을 만든다.

오늘부터 나는 이 건방진 AI가 던진 200개의 독한 질문에 답하며, 내 50년 인생을 탈탈 털어보려 한다. 필명은 '리친년(돌아온 미친년)'. 산전수전 다 겪고 생환한 여자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한다.

“동거하던 남자와 헤어질 때, 보증금이나 가구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가장 치사했던 기억은?”

제미나이가 던진 8번 질문. 이 질문을 마주하자마자 입안이 써졌다. 보증금 몇 푼보다, 가구 몇 점보다 더 비릿하고 치사했던 기억이 내 머릿속을 스쳤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건 결혼 4년 차, 그 지독했던 별거부터였을 거다.

서른다섯에 혼자가 되어 어느덧 15년째. 단 한 번도 ‘죽을 때까지 혼자 살겠다’고 다짐한 적은 없다. 그래서일까, 외로움이 발목을 잡을 때마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은 남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내 생애 마지막이었던, 동거인 듯 동거 아닌 그 기묘한 생활이 시작됐다.

자영업을 하던 나를 위해 새벽마다 매장으로 달려오던 남자였다. 혼자 가게에서 잠드는 내가 걱정된다며,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냐며 안절부절못하던 사람. 결국 그는 내 매장 근처에 원룸을 하나 구했다. 우리는 퇴근 후 그곳에서 만나 마치 신혼부부라도 된 양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그도 나처럼 이혼남이었다. 다만, 서류상 이혼은 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전처와 한집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유부남이 아닐까 의심도 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절대로 문제 될 일 없어. 그냥 애들 때문에 한 지붕 아래 있는 것뿐이야.”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아니, 믿었다.

비극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됐다. 그가 친구 모임으로 며칠간 원룸을 비웠던 어느 날 밤이었다. 양치를 하려는데 문득 컵에 꽂힌 칫솔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새 칫솔을 하나 꺼냈다. 혹시 또 마음이 바뀔지 몰라 쓰던 건 그대로 두고, 다른 디자인의 칫솔을 하나 더 꺼내 나란히 꽂아두었다. 내 공간이고, 내 남자의 공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가 돌아온 뒤부터 공기가 달라졌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연락은 뚝 끊겼고 카톡은 읽고 씹히기 일쑤였다. 집에 무슨 일이 있나? 애들이 속 썩이나? 내가 뭘 잘못했나? 아무리 물어도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그렇게 피를 말리는 일주일이 지나고, 그에게서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컵에 꽂힌 칫솔 세 개가 덩그러니 놓인 사진. “자기한테 할 말 없어?”

그는 내가 자기가 없는 사이 다른 남자를 원룸에 끌어들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같은 지붕 아래 전처와 살면서 새벽마다 나를 찾아오던 그 남자의 머릿속엔, 고작 칫솔 하나 더 꺼내 쓴 나를 ‘불륜녀’로 몰아세울 시나리오가 가득했다.

일주일 뒤 다시 나타난 그에게 무슨 말이든 듣고 싶었지만, 그는 러닝을 가려던 나에게 "그냥 가라"며 차갑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날, 내 앞엔 사과 대신 더러운 계산서가 적힌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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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랑 모텔비 아낀다고 빌린 집인데 이제 섹스할 일이 있겠나 싶다.”

내 인생 15년 홀로서기 중 가장 모욕적인 문장이었다. 함께 웃고 떠들던 그 원룸은 그에게 그저 ‘가성비 좋은 모텔’이었을 뿐이고, 나는 ‘모텔비 아껴주는 여자’에 불과했다는 선언. 그는 500만 원을 내고 집을 승계하든가 짐을 빼라는 선택지를 던지며, "어제처럼 냉정하게" 답해달라고 지껄였다.

그날 밤, 하늘에서는 구멍이라도 난 듯 장대비가 쏟아졌다. 나는 그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원룸으로 달려갔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들이 뺨을 타고 흘렀지만 상관없었다. 그 남자의 흔적이 묻은 그 공간에 단 1분 1초도 내 물건을 두고 싶지 않았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나는 미친 듯이 짐을 실어 날랐다. 옷가지부터 자잘한 소품 하나까지, 내 자존심의 부스러기까지 싹 다 긁어모아 그 집을 빠져나왔다.

짐을 다 뺀 빈 방에 그 치사한 blob:https://gemini.google.com/3e8c2042-f133-41d9-8215-b7e570c4d0da편지를 던져두고 나오는데,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이별이 아픈 게 아니라, 이런 인간에게 내 마음을 줬다는 게 억울해서 웃음이 났다.

그 장대비는 내 인생의 마지막 동거를 씻어내리는 정화의 의식이었다. 보증금보다 무거웠던 미련을 다 털어버린 밤. 그렇게 나는 다시, 진짜 '리친년'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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