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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May 04. 2022

Work #1

실수하며 살기

운 좋게도 신입사원이 되었다. 학위, 나이, 경력 그 어떤 것도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믿는 구석이 있다면, 여태껏 일해본 경험이었다. 흔히들 돈을 받고 일한 시간은 경력으로, 돈을 받지 않고 일한 시간은 경험으로 간주한다.내게는 또래에 비해 경험과 경력이 많았다.


창피하게도 동료들 사이에서 일을 이끌어갈 때가 종종 생겼다. 경험과 경력이 많았다는 이유로 사소한 스킬들을 조금 더 잘 알았기 때문이다. 메일 제목을 간결하게 쓰는 법, 인터뷰를 하기 위해 상대의 연락처를 찾는 법, 다양한 자료를 팀원들과 함께 보고 관리하는 법 등이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한 일상일지 모르지만, 그 일상은 누군가에게 기술이다. 그 기술을 익히기까지 여러 번 실수하고 자기 자신을 질책해야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의 일 경험 뒤에, 신입사원이 되고 들었던 칭찬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내가 쓴 메일을 읽고 소소한 기쁨을 느낀다는 말이었다. 이메일을 잘 쓴다는 말만큼, 신입이 신입 같지 않다는 말만큼 기분이 좋았다. 소소한 기쁨은 기본이 갖춰진 이후에 고민할 수 있는 단계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고민 단계까지 꽤나 잘해내고 있다는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처음 비즈니스 메일 작성법을 배울 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온점이 나오기도 전에 줄을 바꿨고, 줄글과 항목화된 단어들이 혼재한 글이었다. 첫인상은 편지 같지만, 읽다보면 보고서 같은 글이었다.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길텐데, 이 적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첫 인턴 때는 이메일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두 번째 인턴 때부터 나는 한 번에 100명과 이메일로 대화해야했다. 이전과 달리 너무 생경한 상황을 이겨내려면 어쩔 수 없이 메일에 적응해야했고, 그러기 위해 선배들에게 걸었던 참조와 메일 실수들, 그리고 피드백은 켜켜이 쌓여갔다.


웃프게도 그렇게 단련하고 칭찬을 들어도 여전히 메일에서 실수가 터진다. 하루는 신입사원에게는 높게만 느껴지는 분들께 일정과 안내사항을 전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 전에 몇 번을 살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수가 터졌다. 바로 정정메일을 보냈다.


더 무서운 일이 이어졌다. 정정메일조차 오류가 있었다. 일정을 전하는 메일에 일정이 잘못된 것이다. 심지어 그 오류를 팀장님께서 발견하고 알려주셨다. 신입의 귀여운 실수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이 원래 꼼꼼하지 못한 사람이라, 이런 실수가 잦았고, 앞으로도 계속될 듯 싶었다. 재정정메일을 보내고 나서 실수 그 자체와 꼼꼼하지 못한 성격을 탓했다.


바로 직후에 선배의 질문은 정곡을 찔렀다. 요즘 어떤 거 같은지 물었다. 무서운 선배였음에도 머리를 쥐뜯으면서(진짜였다) 나의 메일 실수와 꼼꼼하지 못한 성격을 말씀 드렸다.


그때 선배의 말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잊히지 않는다. 시도하는 사람만이 실수를 한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시도조차 안하는 사람이다. 그 말을 책에서, 영상에서 볼 때와 사뭇 다른 임팩트가 피어났다. 그 말을 듣고 커다란 안도감이 들었다.


첫 번째는 그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일 잘하는 선배였기 때문이다. 그가 한 말은 실수 다음의 시도들이 그를 견고하게 만들어준 시간을 담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여러 선배도 실수를 했고, 여전히 실수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오히려 그 고백이 실수를 이겨낸 그들을 더 커보이게 했다. 태산 같은 그들도 여전히 더 높아지고 있다니.


두 번째 이유는 그 말의 무게에 있었다. 자신의 실수를 밝히기는 생각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다. 마음에 가면을 쓰고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이유로 인해 생긴 실수라고 변명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실수를 나누어준다는 건 믿음과 응원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 사람이 이 실수를 악용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실수를 거름으로 더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실수투성이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지도록 격려해주는 분들과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마지막 이유는 여러 옵션 중 정확히 그 말이었기 때문이다.왜 그렇게밖에 못하는지를 꾸짖음 당할 수도 있었고, 그 실수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당장 논의할 수도 있었다. 전자였다면 다음 시도는 커녕 메일을 열기만 해도 두려워졌을 것이다. 극복방안을 고민해보는 건 어쩌면 가장 유익해보인다. 하지만 ‘할 수 있다’는 용기는 실천을 앞선다.


그 어떤 전개도 아니라 그 말이 있었기에 나는 여전히 실수해도 새롭게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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