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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가지 않은 길 May 26. 2022

박수받을 무면허 운전(1)

헝그리 코리언의 용기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정공구장도 이곳만은 피하고 싶은 구간이 있었으니,  4공구가 이달 들어 작업에 들어간 5-F 구간은 계약서상에 다음과 같은 특별조항이 있었다.    

  

   ‘본 구간은 많은 종교행사가 개최되는 곳으로 착공 첫날부터 1개월 이내에 공사를 완료해야 한다. 이를 이행하지 못할 시에는 2만 불의 페널티를 부과된다.’     


   5-F 구간은 길이가 20km 정도로 최소 2개월은 소요되는 공사량이었다. 거의 불가능한 요구에 페널티 단서까지 붙였으니 말도 안 되는 독소조항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계약은 계약이니···. 정 공구장은 횃불로 어둠을 밝혀가며 연일 철야 작업을 강행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마감일을 하루 앞둔 29일. 전체 구간 중 단 300m만 남겨 놓은 상태에서 아침 해를 맞았다. 그것도 상수도관 매설공사 6단계 ― 땅 굴착, 땅 평탄화, 배관, 수압테스트, 되덮기, 포장 ― 중 마지막 포장작업만 남았으니, 오늘내일 쉬어가며 해도 충분한 작업량이었다. 

  그동안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괴력을 발휘해 사우디 당국자들을 놀라게 했듯, K건설은 또 하나의 기적을 눈앞에 둔 것이었다. 어깨를 내리누르던 긴장에서 해방된 최 소장은 작업자들에게 특별 간식을 제공해 격려하리라 마음먹었다.


  한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닥쳤다. 평소에 이런저런 일로 회사와 자주 갈등을 빚었던 감독관이 아침 일찍 나타나 느닷없이 특별조치 사항을 전했다. 남은 300m 구간 중 200m는, 담맘 시 개발 예정지로 지정됐으므로, 포장 전에 워닝 테이프를 씌우고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워닝 테이프는 영국에서 수입해 와야 하는 품목이니 말이었다. 회사가, 시공도면에 개발 예정지 표시가 없었다. 그 후 변동이 있었다면 감독관이 사전에 알렸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감독관은 도시개발 계획은 언제라도 변경될 수 있으니 시공자가 알아서 체크할 일이지, 감독관이 통보할 의무가 있는 게 아니라며 발뺌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켕기는 게 있는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마도 시공도면 작성 후 개발 예정지로 편입됐는데, 그가 꿍치고 있다가 인제야 생각나 아차 하는 모양이었다. 


  회사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 지역에서 상하수도 시공사는 국제개발뿐인데 수입품목이니, 현지 상점에 있을 리가 없었다. 사정은 뻔하지만, 현지에서 구하는 것 외에 달리 해결방안이 없지 않은가.


  상황이 암담할 때면 박 차장이 구매자에게 하는 말이 있었다.

  “어떻게든 구해 봐. 사막에서 물고기를 요청해도 구해오는 게 구매자의 역할이야.” 

  무길이 구매업무를 하면서 간간이 돈 들고도 못 사는 물건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 여유는 있었고, 정 안되면 대체품목으로 때웠지만, 지금은 대체품목은 고사하고 시간은 단 하루뿐이었다. 

  최 소장과 정 공구장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길을 내보내지만, 시각장애인 혼자 초행길 찾아가는 격이라, 물고기를 잡아 오리라는 기대는 할 수 없었다.


  무길은 이 가게에서 저 가게로, 저 가게에서 또 다음 가게로, 공구점부터 문방구까지, 워닝 테이프와 사돈의 8촌이라도 될성싶은 가게는 샅샅이 훑어나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화살에 감히 머리를 못 들고,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헉헉 숨이 막혔다. 게다가 보여줄 샘플조차 없으니 들리는 가게마다 레코드판 돌리듯 같은 설명을 되풀이해야 했다.   역시 이변은 없었다. 가는 곳마다 상인들은 그런 물건을 왜 여기 와서 찾느냐는 식으로 멀뚱 거리며, 몇 마디 듣고는 말을 끊었다. 어디서 구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도, 지난주부터 시작된 라마단(이슬람교의 종교의식으로 일출부터 일몰까지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함)에 지칠 대로 지친 상인들은 대답 대신 고개만 저어댔다. 


  마침내 살라 타임을 알리는 아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인들이 일제히 가게 셔터를 내리고 사원으로 몰려갔다. 오전 장사가 끝난 것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언제나 평소보다 시계가 더 빨랐다. 아니,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들 별수 있었겠는가. 무길은 터덜터덜 사원 쪽 주차장으로 향했다. 중요한 시험을 망친 학생처럼.

  얼마를 갔나, 축 처진 그의 어깨 위에 누군가 손을 얹었다. 돌아보니 마지막 들렀던 상점 주인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아까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며, 무길에게 천금 같은 정보를 안겨줬다. 쥬벨일에 안전용품 상점이 있는데 거기 가면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며 친절하게 안내도를 그려줬다.     




  그들, 최 소장, 정 공구장, 박 차장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졌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다니! 그게 정말이냐! 고 세 사람이 몇 번이나 돌아가며 물었다. 확실한 건 가봐야 안다고 해도, 그들은 하늘이 도운 거라며 다된 일인 듯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주베일은 캠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도시인 데다가 초행길이라, 오침 시간이 끝나자 즉시 출발을 서둘렀다. 세 명의 윗분이 열혈 팬인 듯 불볕 세례를 무릅쓰고 주차장까지 배웅 나오며, 자네만 믿는다는 말을 구구단 외우듯 반복했다. 


  전속력으로 달려 사막 도로가 거의 끝나는 지점에 이르렀는데, 앞차들이 꾸무럭거린다 싶더니 시가지로 들어서는 길목부터 차량이 길게 늘어섰다. 왜 이러지? 차에서 내려 멀리 앞쪽을 살펴보니, 경찰과 운전자들이 뭔가를 주고받곤 했다.

  아, 뿔싸! 면허증 검사를 하는 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국인들이 무면허(사우디 국제면허 실기시험이 너무 까다로운 데다가 업무에 쫓겨 직원들은 면허 없이 차를 몰았다)로 운전한다는 소문이 돌아, 경찰이 단속에 나섰다더니······.   

  하나둘, 앞선 차량이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한국인 운전자가 뻔했다. 엄격한 모슬렘 율법에 따라 통치되는 이 나라는 형벌이 가혹했다. ‘눈에는 눈 이(耳)에는 이’ 사람을 때리면 열 배의 태형(채직질)을 가하고 도둑질하면 손목을 자르는 나라다.


  그렇다면 무면허 운전자에게는 어떤 처벌이 주어질까? 아마도 태형을 면키 어려우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태형을 당하면 엉덩이가 해져서 나올 정도로 끔찍하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떡하지?···별수 있나. 나도 돌아갈 수밖에···차를 돌리기 위해 앞차와의 간격을 넓혀 놨다···그러나, 막상 핸들을 틀려니 아쉬움이 너무 컸다···여기만···여기만 통과하면, 회사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다 된 밥이나 다름없는데···.

  핸들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냥 밀어붙여?···아니, 내가 뭐라고! 회사에 목숨 걸었나?   그래도 그렇지··· 페널티 2만 불을 어떻게···너무 아깝잖아···무면허로 운전했다고 그렇게까지야 하겠어? 지레 겁먹는 건지도 모르잖아.   머릿속이 거미줄처럼 엉키고 마음은 콩 튀기듯 바쁜데, 차는 점점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경찰과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젠 더 우물거릴 여유가 없었다. 마음을 정해야 했다···순간, 세 명의 열혈 팬이 눈앞을 가렸다. ‘그저 자네만 믿네, 자네만 믿어, 자네만 믿는다고.’ 란 말이 귀에 쟁쟁했다.···어떻게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겠는가. 

  결심이 서자, 회사의 긴박한 상황이 그에게 지혜와 용기를 줬다. ‘그래, 이 나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아. 경찰은 내 말을 믿어줄 거야.’    

 마침내 무길의 차례가 됐다.

  “앗 살라 무···알라이 쿰!”

  외국인이 아랍어를 하면, 그들은 외국인의 서툰 발음을 재미있어하고 대번에 친근감을 보였다.

  “와 알라이 쿰 앗 살라 무!”

  아침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을 경찰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운전면허증 제시해 주세요.”

  “로크 사 씨···피···막 타바.(사무실에···두고··왔는데요).”

  목소리가 심히 흔들리고 있었다.

  경찰이 무길을 빤히 바라봤다···저 눈, 저 눈초리의 의미는?···숨을 죽이고 경찰의 입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귀까지 울렸다.···이렇게 긴 시간이 있을까. 1초가 1시간 같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경찰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래요? 다음부터는 꼭 가지고 다니세요.”

  분명 경찰의 말이었다.

  “나 암.(네, 명심하겠습니다.)”

   눈치 없이 안도의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혹시 경찰이 눈치챈 건 아닌가? 다시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쓸데없는 걱정! 경찰은 보너스까지 얹어줬다.

  “꼬리?(한국인인가요?)”

  “나 암.(그렇습니다)”  무길은 경찰이 다음에 할 말을 짐작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넘버르 원.”   경찰이 환하게 웃으며 엄지를 세워 보였다.(현지에서 한국인 인기가 폭발적이어서, 그곳 사람들은 꼬리를 만나면 으레 그런 식이었다.)

  “슈~~~~ 딴소리하기 전에 빨리 가야지. ‘슈~’ 소리와 동시에 경찰을 지나쳤다. ~크란”(감사합니다.)

  이런 식이면 단속은 왜 하지? 사무실에 두고 왔다면 될 거로 생각했던 자신도 어이없고, 그 말을 믿고 보내주는 경찰관도 어이없잖은가. 

어쨌든 천만다행이긴 하지만, 순박한 점을 이용해 속여먹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꿀꿀했다.


  마침내 주바일에 도착했다. 별 어려움 없이 시가지 동쪽 마지막 블록에 이르니 ‘Al-Jubayl Safety Supplies Store(주바일 안전용품 상회)’라는 간판이 마치 애인의 얼굴처럼 눈에 들어왔다. 

  상점 주인은 재고가 두 개밖에 없는 데 운이 좋았다며, 1m 간격으로 ‘WARNING’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노란색 비닐 두루마리를 내줬다. 

‘네가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무길은 로또라도 당첨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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