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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지적 작가 시점 Dec 26. 2023

형사과장이 가끔 비겁해지는 이유

쾅쾅쾅! 쾅쾅쾅!

"네~ 들어오세요."


쾅쾅쾅!


"네~~ 들어오세요!!"


벌컥.


"아니 밖에서 그렇게 큰소리가 났는데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까?"

"네?? 무슨 소리라뇨??"



12월 느 날.

복도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또렷하진 않지만 민원인이 "나이도 어린놈이..." 하는 것 같았고, 이에 모 강력팀장이 아니 "선생님, 그래도 관공서에서 일하는 공무원한테 나이 어린놈이 뭡니까?" 하는 말도 들리는 것 같았고... 서무 담당 여직원도 가세하여 큰소리로 말리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아니 연륜이 쌓이기 전에는 당장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나가 "무슨 일이십니까?" 하고는 민원 해결을 주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부서의 최종 책임자인 내가 무조건 나가서 끼어든다고 민원이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 법이다.

담당자도 있고, 서무 직원도 있고 팀장도 있는데 일단 믿고 맡겨 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있고 난 후, 몇 초간 정적이 이어졌다.

민원이 해결되었나... 생각하던 찰나 갑자기 깜짝 놀랄 정도의 노크, 아니 강한 주먹질 같은 문두드림 소리가 들려왔다.


쾅쾅쾅! 쾅쾅쾅!

타이밍상 그 민원인임에 틀림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들어오시라고 했다.


"네~ 들어오세요."

내 말을 못 들었는지 또 노크를 해댔다.


쾅쾅쾅!

문으로 다가가며 더 큰소리로 외쳤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6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왜소한 체격의 남성이 서류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안내를 했다.


1:1로 상대해서는 어떤 위해를 당할 수도 있어 복도를 좌우로 두리번거렸으나, 세 직원 모두 다 돌아가 버렸는지 아무도 없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라고 자리를 안내해 드리고 물 한잔을 건넸다.


자리에 앉으며 격앙된 그가 말문을 열었다.

"방금 복도에서 큰소리 난 것 못 들었습니까?"


능청(?)을 떨었다.

"아니, 무슨 소리 말입니까?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못 들었다고요?"


"네, 다른 일하다 못 들었습니다만, 무슨 민원으로 오셨는지요?"


그러자 서류 봉투에서 서류를 한 묶음 꺼내며 말을 시작했다.


"내가 6개월 전에 폭행당해 신고를 했는데, 처분을 보니 내가 피의자로 둔갑되어서 경위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담당자 이름과 연락처도 알고 있어서 직접 만나 설명을 들으러 왔다고.


서류 맨 뒤에 적힌 담당자 이름을 보니 내가 담당하고 있는 형사2과가 아닌 형사1과 형사였다.


"선생님,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으면 좋은데요, 이 사건은 담당자가 형사1과입니다. 저는 형사2과장이고요."


갑자기 그분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튼 억울한 것 아닙니까? 내가 피해자인데..."


"선생님 중간에 말 끊어서 미안합니다만, 제가 도움 될 수 있으면 좋은데요, 저희 과 사건이 아니라 저에게 말씀하셔도 의미가 없습니다. 형사1과에 문의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들어보세요. 사실 제 며느리가 판사고 사위도 판사인데, 내가 거기 알리면 잘 해결되겠지만, 거기 안 알리고 직접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그리고, 내가 국정원 퇴직한 한참 공무원 선배인데, 나이도 어린 경찰 놈이 그렇게 나한테 막 대하면 안 되죠."


"네, 선생님. 제가 사건 내용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씀드렸듯이 제가 도움드릴 만한 민원이 아닙니다."


물 한잔을 들이켜면서...

"암튼 물 한잔은 고맙습니다." 라며 잠시 진정된 듯보였으나...


다시 며느리가 판사, 사위도 판사, 전직 국정원 직원이라는 사실 확인할 수 없는 말을 연신 늘어놓으며 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마치 '나, 이런 사람이야!' 하듯이 말이다.


퇴근 시간이 임박해져 와 전자결재도 해야 하고 수사기록 검토도 해야 하는데,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아니, 선생님. 그러시면 그 며느리나 사위에게 말씀하시지 여기는 왜 오셨습니까?"


그러자, 민원인의 눈빛이 돌변하며 주체할 수 없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할 소리입니까? 내가 며느리나 사위에게 말 안 하고 해결한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겁니까? 예? 예?"


짧은 면담이었으나, 경험칙상 분노조절장애나 조울증이 있는 분 같았다.

감정의 기복이 무척 심했다.


아... 이러니 아까 우리 과 직원들도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복도에서 우연히 만나 헤매고 있는 민원인에게 선뜻 도움을 주려 말을 건넸다가 언쟁이 되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겨우겨우 달래서는 민원인을 돌려보냈다.


"휴~~"

한숨 돌리고 업무를 마무리했다.


저녁 약속이 있어 18시 정각이 되자마자 경찰서 앞으로 나가 택시를 타려 기다렸다.


그 순간!

아까 그 민원인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10미터 옆 골목에서 나와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예전 같으면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까 민원은 잘 해결되셨어요?"라고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을 것이나...

이 분은 그렇게 응대해야 할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 시간도 임박해 오고, 혹시나 다시 붙들렸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비겁해 지기로 했다.


목을 감쌌던 목도리를 마스크 마냥 입 위로 한껏 추켜 올리고 거북이 목 집어넣듯이 목을 푹 파묻어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나를 못 알아보고 가던 길을 가셨다.


한순간 비겁한(?) 행동으로 다행히 약속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경찰생활 27년 차에 접어드는 나는 가끔씩 이렇게 비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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