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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난시 06화

도망

by 다날


17


올해는 장마가 늦었다. 더위가 한풀 꺾여 가올이 오나 싶더니 며칠 전부터 하늘엔 구멍이 났다. 비가 쉬지 않고 쏟아졌다. 영은 비 때문에 노래를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렇다 쳐도 혼과 한은 왜 나가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이른 저녁에 자서 오후 2시에나 깼다. 다른 인간들이 보기엔 우리의 시간은 지나치도록 사치였지만, 우리의 수면은 전략적이었다.

영의 공연 중단으로 간간이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 마저 힘들어졌다. 우리는 의식주 중 주에 이어 식을 잃었다. 배고픔은 내가 개라서가 아니라 어떤 종족에게나 엄청난 고통이다.

의외로 해결방법은 간단했다. 움직이기 위해 먹어야 된다면,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그만큼 먹을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작은 움직임이라도 갖는 시간은 불과 5시간 정도였다. 겨울잠을 빨리 당긴 곰이 됐다. 물론 열아홉 시간을 한 번도 깨지 않고 매일 잔다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나는 일층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깨고 자기를 반복했다. 방광이 저려오기 전까진 화장실 가는 것도 참으며 몸의 허기를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장마는 늦게 온 만큼 짧았다. 채운 냉장고가 비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갔다. 라면 하나도 없는 상황에 절박해졌다. 내 입에 생라면은 밍밍했다. 수프는 정량보다 세 배 많은 수돗물에 따로 타 먹었다. 하루의 식사는 생라면 사분의 일 조각에 수프탕 한 그릇이었다. 나에게 수프탕은 또 너무 자극적이어서 생라면에 물을 마셨다. 그래도 비가 그쳤으니 우리는 이제 나갈 수 있다.


나는 혼자 집을 나섰다. 가출은 아니고 일상적 탈출이라 하면 괜찮겠다. 혼과 한은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고 영은 학교를 갔다. 영은 경찰과의 마찰 이후 저녁에 나를 데리고 나서지 않았다. 나도 구태여 그를 미행하면서까지 영을 따라고 싶진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영리한 인간이다.

나는 해가 떠 있을 때 집을 나갔다. 원래 햇빛을 좋아한다. 가끔은 광합성 중인 잡초를 부러워한 적도 있다. 저녁보다 점심 이후의 거리가 훨씬 한산하기도 했다. 그래도 절대 방심할 순 없었다.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나를 어디선가 바라봤다. 카페, 식당, 회사 같은 건물 내부나 지하철, 기차, 차 안에서 어디서든 나를 감시할 수 있었다.

등이 어느 정도 따가워질 때쯤 나의 종족들을 찾으러 다른 집들의 정보를 캐러 다녔다. 아무리 햇볕이 좋아도 자유와 목숨을 걸고 광합성을 목표로만 거기를 걷는 용감한 놈은 없다. 낮의 온기는 부수적인 행복이었지 외출의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상가 건물들 사이의 좁은 골목에서 백이를 처음 만났다. 군더더기 없이 하얗고 고운 털로 덮인 작은 강아지다. 나는 외자로 부르는 게 편해서 그녀의 이름을 백이라 불렀다. 그녀에게선 라벤더 향기가 그윽하게 흘렀고, 털도 오늘 아침에 미용실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윤기가 났다. 분명 주인이 있는 개였다. 그것도 강아지한테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를 쏟아 부울 수 있는 인간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덩치도 내가 크고 몸속 박힌 퀴퀴한 냄새도 숨길 수 없었기에 조심스레 백에게 다가갔다. 놀라서 주인에게 고자질이라도 한다면 골치 아파졌다. 예상외로 그녀는 나의 접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너 이 동네 사는구나?”

이사 간 옛 친구를 오랜만에 낯선 곳에서 만난 것처럼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나이는 나보다 많아 보였다.

“저 아세요?”

“널 어떻게 몰라. 너 여기서 엄청 유명해.”

“제가요? 전 여기 온 지 세 달 정도 되긴 했지만 이 시간에 나온 건 처음인데요.”

“너 그 공원에서 노래 부르는 애 옆에 누워있던 애 아니니?”

“맞아요.”

소름이 돋았다.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잡아가지 않는 건가. 예전 집에서 봤던 트루먼 쇼가 실재하는 듯했다. 단지 영이 유명한 인간이었기를 바랐다.

“여기서 너 모르면 간첩이지. 노래에 맞춰 춤추는 개로 유명하니까.”

“전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춤을 춘 적도 없어요.”

“나도 우리 주인이 동영상으로 보여줘서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인간들은 너를 춤추는 개로 여기던데?”

나는 분명히 가만히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동네 춤꾼이 된 사실엔 실망스러웠다. 영의 배경이라서가 아니라 적어도 친구들에게 나는 혁명가였기 때문이다. 또 인간에 대한 변함없는 나의 안목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번에도 자기들의 기준에서 판단해 자기들 입맛에 맞게 요리하여 나란 음식을 만들었다. 내가 춤을 췄다니. 춤하고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존재가 우리를 지배한다니,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춤춘 적 없어요! 가만히 누워있었다니까요?”

“알겠어. 네가 그런 거면 그런 거지 뭘 또 화를 내고 그래. 나도 인간들의 말은 걸러 듣는 편이라 크게 믿진 않아. 단지 밤에 집구석에 처박혀서 꼬리나 흔드는 나랑 비교했을 때 네가 부러웠을 뿐이지.”
백의 말은 일시적인 화해의 손길이 아니었다. 한탄의 숨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났네요.”

“옆에 있던 학생이 네 주인이니?”

“비슷하긴 한데 주인은 아니에요. 친구예요.”

끝내 주인이라고 인정하긴 싫었다. 나는 나와 같은 처지의 영을 좋아하고 아꼈지만 나에게 주인이 있는 건 원치 않았다. 영 역시 나의 주인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을 테다. 그랬다면 걸을 때 목줄 한 번 잡아당기지 않고 나란히 걸어준다는 건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니까.

“부럽다. 아무튼 내가 아까부터 봤는데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닐 필요는 없어. 우리 개들이나 인간들이나 다 그 학생의 개라고 생각하니까.”

이미 난 주인이 있는 개가 돼 버렸다. 잠시 대화의 흐름을 놓쳤다.


“무슨 생각해?”

“……”

“적어도 지금은 널 잡아가라고 신고하는 인간들은 없을 거야. 혼자 다닐 때도 당당하게 다녀도 돼.”

과정은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쨌든 나에겐 좋은 소식이었다. 마음 편히 햇빛을 쬐러 산책할 수도 있고 사장의 방으로 끌려가는 악몽을 더 이상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나에 대한 다른 얘기는 없었는지 궁금했다.

“저에 대해 다른 건 들은 거 없어요?”

“경찰이 그 학생을 쫓아낸 이유 같은 거?”

영이 쫓겨나던 장면을 누가 몰래 찍었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얹혀 일파만파 그 모습이 퍼져 한동안 경찰의 진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유라면 저도 알아요. 아파트 주민들이 시끄럽다고 신고했다고 들었어요.”

백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본 채로 눈을 깜박였다.

“내가 알고 있는 이유랑은 다르네.”
“어떻게 알고 있는데요?”
“나는 부동산 아줌마들이 떠들어댈 때 들은 거라 네가 알고 있는 이유가 더 정확하겠지만, 그들은 학생이 아파트단지 환경조성을 방해해서라 신고한 거라 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파트 주민들 중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 학생의 공연을 하나의 비행이라 여겼나 봐. 자기 애들에게 변화가 올까 봐 그걸 방지하기 위함이었대. 학생의 본분을 잊는다나 뭐라나. 또 다른 몇몇은 학생이 노래를 함으로써 밤에 일진들이 자신들의 집 근처에 모이게 될까 봐 질색팔색을 했대.”

영은 피의자의 대표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공원의 악마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경찰의 말은 전부 궤변이었다. 영의 말대로 소리가 뻗어나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고 하루 이틀 공원에서 공연을 했던 게 아니었다. 유독 그날 쫓아낸 게 이상했다. 그리고 영은 일진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구와 몰려다닐 에너지와 시간이 없었다.

조롱이었다. 마치 사장의 방에서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고 좋아하며 밥을 먹었던 우리들 같았다. 영도 이제는 혼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가 원하는 답을 듣진 못했다.

“또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게 남았니?”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아니요. 그날 밤 우리 친구들이… 아니에요. 됐어요.”

일부러 한 번 떠 봤는데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내 예감이 맞았다. 그날의 친구들은 며칠 간의 보여주 식의 맹세에 대한 실천을 보여준 것이었고, 이 동네에선 배만 채우고 모두가 도망간 것이다. 그래, 아무래도 두려워서였겠지. 죽음의 문턱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은 자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을 한 번의 탈출로 부수긴 쉽지 않았겠지.

“뭔데? 친구들?”

“아니에요.”
“왜 말해 봐 봐.”
“나중에요. 때가 되면요.”


백은 그 상가의 모퉁이에 위치한 부동산 주인의 강아지다. 그녀는 동네의 개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말로는 부동산엔 맨날 몇몇 아줌마들이 오는데 그들을 정보통이라 불렀다. 이 동네는 물론이고 옆 동네의 소식까지 모조리 뀄다. 그녀는 동네의 웬만한 인간들과 개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들을 알았다. 아직 그날의 밤과 나의 탈출을 말할 만큼 신뢰를 가질 사이는 아니라 생각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인간이나 개는 누구예요?”

백은 약간 우쭐대며 털을 털어냈다.

“인간이라면 전부 조심해야 되는 건 알 테고, 개라면 아무래도 강식이?”

“강식이가 누군데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이 구역 최대권력자가 강식이야. 여기의 모든 개들은 강식이의 한 마디면 어금니도 바칠 정도니까.”

“어디 집 갠데요?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어요?”

“알려줄 순 있는데…웬만하면 찾아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거야. 내가 본 개 중에 가장 영악하고 강한 개니까. 뭣도 모르고 찾아갔다가 평생 그의 노예로 살아가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니야. 그래도 알려줘?”

“네. 알아야만 해요. 방금 막 강식이가 꼭 필요해졌거든요.”
“네가 그렇다면야…… 중심상가를 기준으로 아랫마을에 가장 큰 집을 찾아가면 돼. 여기서 길 건너 주택단지로 가면 새하얀 지붕이 홀로 우뚝 솟은 집이 보일 거야. 그 집에 강식이가 살아. 근처 가면 강한 냄새가 날 거야.”

백의 표정은 어느새 변했다. 정보를 독점하고 있다는 식의 거드름은 사라지고 공포와 걱정의 눈빛으로 나의 발을 핥았다.

“발에 강식이 냄새 남겨뒀어. 조심하고.”

“혹시 또 물어볼 게 있으면 찾아와도 돼요?”

“그래. 대신 조심하고.”


18


백의 말대로였다. 주택단지로 들어서기 전부터 모든 땅을 거느릴 법한 크기의 새하얀 지붕이 솟아 있었다. 한 선의 굴곡도 없는 사각형 모양의 구름이 덮인 형세였다. 먹구름이라면 모를까 하얀 구름을 보며 두려움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흰색은 누구에게나 그런 색이었다. 하지만 강식이가 산다는 집의 백색은 빛을 머금고 숨기는 흑색보다도 어딘가 섬뜩하고 위압적이었다. 저런 집의 개라니 가히 동네의 왕이라는 것에 의심을 풀을 수 없었다.

입구는 또 어찌나 웅장하던지 대문 안은 물론이거니와 그 지붕조차 가렸다. 외벽과 지붕의 그림자만이 나를 덮쳤다. 지붕과 문처럼 강식이의 체구는 나보다 두 배 이상은 클 거라 확신했다. 지금 나는 혼자였다.

나의 인기척이 들렸는지 누군가 외벽 건너편에 귀를 대고 내 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박자로 봐선 두 발은 아니고 네 발이 연속적으로 교차하며 움직이는 리듬이었다. 나는 발가락에 힘을 주어 뒤꿈치를 살짝 들고 낙엽들 사이의 빈 공간만을 밟으며 대문으로 향했다. 일종의 정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뿐히 걸어봤자 개 걸음이었다.

“강식이는 어딨나요?”

나보다 몸집이 작은 검은 개였다. 강식의 부하쯤 돼 보였다.

“누군데 강식이를 찾나요?”

저쪽도 꽤나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이라고 합니다. 강식이한테 볼 일이 있어서요.”

“무슨 일인데요?”

“부탁할게 좀 있어서요.”


검정이는 나의 방문 목적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고 안으로 안내했다. 푸른 잔디밭이 마당을 꽉 채우고 있었는데 제초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았다. 잔디 위론 하얀 천막 아래 큰 원목탁자와 고풍스러운 의자 네 개와 여러 가지 목공품들이 완벽한 배치구도를 이뤘다. 사실 마당이라기 보단 정원이라 하는 게 맞겠다. 잔잔한 잔디 위로는 코스모스가 경쟁이라도 하듯 까치발을 들고, 그들의 허리를 백색의 국화가 안았다. 검정이는 정원의 향기들을 가로질러 정원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의 집치고는 너무 세련되고 아늑했기에 그가 강식이를 불러올 때까진 잠시 정원을 감상하기로 했다. 그러나 검정이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나에게 하고 싶은 부탁이 뭐죠?”

“강식이만 좀 불러 주시겠어요?”

“지금 이 집에 개라곤 나와 그쪽뿐일 텐데요. 나한테 뭘 부탁하려는 거죠?”

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크기의 강아지가 강식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강식이는 내가 당황한 걸 눈치챘는지 조용히 고기 한 점을 건넸다. 일단 먹고 진정하라는 식의 눈빛을 보냈다.

“맛있네요.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다른 분인 줄 알았네요.”
“괜찮아요. 내가 당신을 알고 있으니까요.”

“혹시 제 춤 때문인가요?”

“글쎄요. 이 동네에서 당신은 저만큼이나 모를 수 없는 개니까요.”

그의 어감과 분위기는 상반됐다. 부자 집주인의 개라 확실히 억양과 톤에 고급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나에게 부탁하려는 게 뭔가요?”

행여나 나의 반란이 혁명이 되지도 못한 채 무산될까 봐 주변의 귀들을 경계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집에 아무도 없다며 편하게 말하라 했다.

“제가 계획하고 있는 일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건 좀 힘들겠네요.”
“아직 어떤 일인지 말하지도 않았는데요?”

강식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백이 알고 있는 그의 또 다른 얼굴이 등장했다.

“당신의 반란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모두가 당신이 반란자임을 알고 있어요. 세 달 전 그 사건을 나는 똑똑히 기억해요. 그쪽이 풀어 준 개들이 전부 우리의 것들을 빼앗고 훔쳐 달아났으니까요. 우리는 당신과 입을 섞는 것조차 꺼려해요. 당신의 말을 듣다 보면 우리도 당신의 친구들처럼 지금의 삶을 내놓고 반란에 도망가게 될까 봐 두려워요. 이 동네 모든 개는 제 말을 따를 수밖에 없고요.”

머리가 뜨거웠다. 나의 친구들은 나를 배신하지 않고 맹세를 지키려 했다는 것, 백처럼 모두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 그리고 나의 종족들이 나를 두려워한다는 것 모두가 한순간에 충돌한 머릿속은 마구 찢겨 나갔다. 빈 틈의 실을 찾아야 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나의 말을 듣다 보면 당신들도 반란에 참여하게 될까 봐 두렵다는 건 반란을 해야 함을 동의하는 뜻 아닌가요?”

“우린 당신만큼 힘들게 살아오지 않았어요. 인간들의 보살핌 아래 삼 시 세끼 거르지 않을 수 있었고 추위에 떨지도 더위에 말라가지도 않았어요. 우린 인간에 대해 당신만큼의 적대심이 없어요. 무엇보다 지금의 삶을 버리고 얻게 되는 대가가 죽음이라면 누가 그 길을 선택하겠어요. 저를 포함한 이 동네 개들은 지금이 좋아요.”

그의 논리에 오류는 없었다. 동시에 내가 객기를 부리는 미친놈처럼 보였다. 맞다. 나는 항상 겨울엔 추웠고 여름은 축 쳐졌다. 어쩌면 내 외모와 능력이 부족해서, 선택받지 못해서, 경쟁에서 밀려서 실패한 인생을 살아온 걸지도 몰랐다. 원래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쪽은 패자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삶이 원래 인간에게 의존하는 삶은 아니잖아요. 물론 나는 당신처럼 주인 있는 개로 살지 못했어요. 언제나 인간들에게 맞고 쫓기며 위선에 속아 또다시 버려지는 삶을 살았어요. 그렇지만 당신들의 편안함을 무시하진 않아요. 죽음의 문턱에 설 때마다 제발 죽여줬으면 하고 바랐어요. 하지만 우리의 편에 서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찾으려는 인간을 만났어요. 필사적으로 제대로 살고 싶어요. 무모한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난 당신이 절실해요.”

그는 등을 살포시 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하필 나여야만 하죠?”

마지막 기회란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의 동공이 경계에서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당신 같은 강한 개가 필요해요. 처음엔 사거리 부동산 집 백이한테 강식이란 개에 대해 듣고선 덩치만 큰 무식한 놈이라 생각했어요. 그래도 이 동네의 개들은 당신을 따른다더라고요. 신념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엔 힘이 필요해요. 적과 싸울 수 있는 물리적인 힘이요. 뜻만 맞다면 당신은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될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신은… 인정하긴 싫지만 나보다 똑똑해요. 그리고 또 분하지만 당신은 내겐 없는 힘을 갖고 있어요. 나를 따르는 개는 없지만 당신은 모두가 따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필요해요.”

“우린 이 동네에서 인간의 노리개로 살다 이제야 공존하는 존재로 인정받았어요. 우리도 나름 우리대로 투쟁을 통해 자유를 얻었어요. 당신이 꿈꾸는 세계에 비하면 억압적인 자유지만 당장의 충족되는 우리의 만족감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당신과 함께 할 순 없어요. 이건 내가 우리 종족을 지키는 방법이에요. 어쨌거나 당신 또한 매 끼니때마다 식사를 하고 비를 맞지 않으며 자기 위해 이런 계획을 가진 거잖아요. 이미 우린 충분히 맛있는 식사를 배부르게 먹으며 매일 밤을 편하게 보내고 있어요. 더 이상의 바람은 당신이 말한 물리적인 힘, 자연 속 종족 간의 먹이사슬에 반하는 걷잡을 수 없는 욕심일 뿐이에요.”


끝내 설득하지 못 한 채 강식과 헤어졌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영의 하교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변함없이 영은 샤워를 하고 나와 저녁을 먹었다. 어김없이 기타를 메고 집을 나섰다. 혼과 한은 역시 집에 오지 않았다. 도대체 둘은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영은 공연도 하지 않으면서 어디를 가는 건지. 그렇게 우리는 흩어지는 중이었다.


19


혼과 한을 만난 건 일주일 만이었다. 그들은 내가 집에 없어도 찾지 않아서 탈출 시간을 늘렸다. 둘은 중심상가 사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무슨 가게의 홍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손을 거부했다. 경멸과 멸시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인간들의 손을 붙자고 굽신거리며 따라갔지만 끝내 그들은 전단지를 둘이 보는 앞에서 버렸다. 한두 명씩 버리던 종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에 수북이 쌓여 바람에 흔들렸다. 혼은 다시 종이를 주워 연신 구걸했다. 혼과 한은 가게 사장에게 일당으로 이만 원을 받으면 편의점에서 대충 끼니를 때웠다. 허겁지겁 먹더니 어디론가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혼과 한은 동네 중학교 앞 골목에 앉아있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학교 앞으로 간 건 무슨 뜻이었을까 궁금했다. 둘은 일체의 대화도 없이 학교만 바라봤다. 원래 누구나 할 게 없으면 과거에 젖어드는 습관이 있다. 나도 가끔 옛 주인집 딸의 품에 안겨 자던 때를 회상했다.

둘의 위치는 간당간당하지만 교문 밖이었다. 그곳은 전쟁터였다. 돈을 주면 아군이었고 적군은 없었다. 총알과 미사일이 빗발치는 전쟁터만큼이나 상대가 보이지도 않는 전투는 무서움 그 자체였다. 무엇 때문에 전쟁터에 갇혀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일 의심해야 하고, 피폐해진 정신은 스스로가 적군을 만들어 내게 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적군과 싸우는 군인이 바로 혼과 한이었다.

그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엄연히 말하면 돌아가면 안 됐다. 학생이란 신분을 포기하는 기회는 단 한 번이며 다시 되찾을 수는 없었다. 비록 나는 학교를 다녀보진 못 했지만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옛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다시 주인이 있는 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무도 나를 입양하려 하지 않았으며 나 또한 입양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사나운 척, 구제불능인 척, 인간과 어울릴 수 없는 척들을 했다. 사장의 방에서도 보이는 죽음보다 두려웠던 건 보이지 않는 버려짐이었다.

아마 혼과 한도 그렇지 않았을까. 혼은 학생과 어른 사이에서 존재하기 위해, 한은보다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뒀지만 그래도 학교가 아직은 그리울 테다. 몸이 너무 힘들면 나도 그때가 생각났다. 하지만 한 번 버려지면 돌아간 들 버려진 존재일 뿐이었다. 그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공격과 무시는 학교를 다시 적으로 여기고 싸우게 만들었다. 결국 수의 열세에 밀려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문에서 학생들의 소리가 스멀스멀 들려왔다. 하교하는 학생들이 교실에서 모아놨던 이야기를 방출하며 우르르 나왔다. 가방의 무게에 눌려 어깨가 축 쳐진 여학생도 보였고 축구공을 든 남학생 뒤로 스무 명 정도의 남자애들이 걸어오기도 했고 화장을 고치며 대화를 하는 여자애들도 보였다. 모두들 내 눈엔 행복해 보였다.

강식이가 말한 만족감이 저런 것들이라면 이미 그들은 행복했다. 어쩌면 저 길이 맞는 편일지도 몰랐다. 변화는 행복을 앗아가는 듯했다. 행복한 얼굴로 나오는 저 학생들 사이에 유독 두 명의 얼굴만이 행복을 원했다.

혼과 한은 빌라단지 골목까지 누군가의 뒤를 밟았다. 교복을 입은 왜소한 남학생 하나가 그 골목의 입구에 들어서자 둘은 학생의 뒤쪽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각각 한쪽 팔에 팔짱을 꼈다. 다음으로 어깨동무를 하더니 배를 찌르거나 귀에 바람을 불며 장난을 쳤다. 하지만 분명 그 학생의 뒷모습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골목의 끝에서 셋은 오른쪽 길로 빠졌다. 골목을 지나던 인간들은 자연스러운 친구 관계의 장난까지 신경을 써 줄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다. 나도 미행 속도를 늦추지 않고 오른쪽 길로 들어섰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날의 일을 알고 있다. 혼과 한의 냄새가 강하게 났기에 어딨는지 정확히 알았지만, 눈에 담으면 나의 친구들을 잃을까 봐 소리로만 듣고 상상했다.

“최대한 친한 척 해. 웃으면서 우리 몸도 좀 치고 그래라.”
“웃으면서 지갑 꺼내고.”
혼과 한은 학생의 말 따윈 듣지 않았다.

“저 돈 없어요.”
“형들이 밥 좀 먹으려고 그래. 돈을 놓고 와서 그러니까 내일 줄게.”
“그래. 우리가 언제 뺏는다 했냐? 잠깐 빌려달라는 거지.”

학생의 음성은 너무 불안정했다. 혼과 한은 나긋한 말과는 달리 위협을 가했다. 학생은 만 오 천 원이 전부라며 순순히 건네는 것 같았다.

“돈 받고 싶으면 학교엔 얘기하지 말고.”

“뭐 말한다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으니까 얌전히 집으로 가.”
학생이 먼저 가방을 한 손에 들고 터덜터덜 고개를 땅이 꺼져라 떨구고 골목길을 탈출했다.


나는 나의 친구를 잃어갔다. 내가 알던 나의 친구들은 사회의 법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으나 근복적으로 정당하고 합리적인 신념 하에 움직였다. 물론 저들에겐 어쩔 수 없는 생계유지의 수단이었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학교의 학생을 공격하는 건 알을 깨는 혁명이 아니라 단지 노른자를 터뜨리는 비겁한 폭동이다.

아직 갈 곳이 없는 내게 유일한 안식처였지만 변질된 아군과는 함께 일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굳이 당장에 한의 집을 떠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혼과 한은 밤에도 새벽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한 명은 남았으니까.

그런데 나는 영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형들과 있으면 그렇게 행복을 얻을 것 같아서, 그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형들이 변질자가 되어 멀리하는 거라고, 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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