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난시 11화

난시

by 다날


30


날이 추워졌다. 혼의 상처도 메마른 겨울 땅처럼 살과 살이 붙어 얼어갔다. 나는 떨어져 부서진 모든 것과 함께 칼바람에 몸을 맡길 준비를 마쳤다. 혼의 마지막 작전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그곳을 찾았다. 깊고 넓어 외부에선 볼 수 없는 아지트였다. 한의 원룸처럼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만이 천장이었으나 친구들의 눈동자는 별이 되어 은하수를 이뤘다. 모두가 나를 기다렸다. 여덟 번째 총알은 나다.

더 이상의 맹세나 선언은 필요 없었다. 곧장 작전을 논의했다. 목적은 혼의 구출이 아니었다. 물론 인간처럼 복수에 대한 열망도 없었다. 아직 제대로 달려보지 못한 우리를 그렸다.


나는 강식과 공동으로 책임을 맡았다. 월이 지도자로서 작전원들을 훈련했다. 월은 권력을 가진 지도자는 아니다. 모든 회의는 80마리가 넘는 전체가 모여 동등한 조건 하에 이루어졌다. 강식과 내가 계획을 세울 때마다 월이 친구들에게 조언과 동의를 구했다.

결코 혼처럼 한 명의 희생자만 나오는 게 두려워서 공동 책임으로 돌린 건 아니었다. 지난 작전에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얻었다. 책임자가 수행자와 조력자보다 더 절실하게 작전에 임했다. 책임자만이 가지는 설렘과 긴장도 무시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는 부대의 행렬에 희열을 느끼는 대장처럼 말이다. 모두가 책임자가 된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전가할 책임은 없음은 물론이고 의지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

물론 참여를 강요하진 않았다. 처음부터 원치 않는 자는 빠져도 되며, 이탈자는 배신자가 아니라 약속했다. 강식이 말한 그들의 편안한 행복을 비난할 순 없었다. 변화를 만드는 건 비판과 재촉이 아니라 실행 여부였다. 그저 하면 됐다. 성공하지 않아도 됐다. 아무리 맛있는 미끼로 유혹해도 물고기가 물지 않으면 낚시는 실패다. 따라주는 척 속아주는 녀석은 결국 잡을 수 없다. 낚싯대를 들어 올리는 순간 입을 벌려 미끼를 놓을 테니 말이다. 설령 바늘 때문에 수면 위로 올라온 들 금방 죽는다. 애초에 소시지를 던졌던 강식은 알았다. 순수한 힘에 작은 얼룩이라도 묻는 순간 그 더러움은 지울 수 없다는 걸 경험한 권력자였다.

어차피 여기 모인 친구들은 세상에서 버려진 동시에 세상을 등진 존재였다. 주인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이름 없는 개들이었다. 소속감을 맛본 자들은 무리에서 떨어졌을 때 느끼는 억압과 고통이 이름을 잃는 것보다 괴롭단 사실을 안다.

그러나 선택이 아니라 만들어진 소속은 출구 없는 철창과 같았다. 이곳에서 도망간다면 어느 쪽이든 자기 이름을 찾긴 어려웠다. 주인이 있는 개를 택할 시 인간에게 종속될 뿐이고, 주인이 없는 개로 살아갈 시 죽을 때까지 쫓기고 탈출해야 하는 악마가 될 뿐이었다.

우리는 이름을 만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이름은 또 다른 의무를 요구하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고 싶지 않았다. 다만 작전 시에 매번 친구들이라 칭하기엔 혼선이 우려됐다. 따라서 임시로 명칭을 정했다. 주인이 있는 개와 주인이 없는 개 사이의 개가 아니라, 우리 전체 이름은 ‘지금’이다.

‘지금’에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산 밖의 세계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주인이 있는 개거나 주인이 없는 개거나, 학생이거나 어른이거나, 돈을 버는 자거나 무시당하는 자거나처럼 말이다. 우리뿐 아니라 양쪽 사이에서 외톨이로 살아가는 인간들도 많았다. 심지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인간들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양쪽 중 한쪽으로 결국 기어 들어가는 이유는 지금이 없어서였다.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를 위해서만 오늘을 바치기 때문에 당장 본인들이 누구인지 몰랐다. 놀라운 건 저들이 투자한 시간은 다른 인간들을 위한 낭비로 남았다.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 순간 자연스레 반대쪽을 욕했다. 주는 밥과 따뜻한 이불을 선택한 녀석들은 주인에게서 버려지면서 나를 음해했었다.

우린 지금이 중요했다. 나중에 어떤 주인을 만날지 센터로 잡혀갈지 따위는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 다움은 지금에서 나온다. 물론 우리도 정의할 수 없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말을 세계에 드러내는 것 자체가 작전의 성공이었다. 의미 없는 이름은 누군가가 또 쉽게 지어줄 수 있다.


31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 전체가 모여 계획을 준비했다. 혼이 사라진 뒤로 우리와 뜻이 같은 인간을 찾지 않았다. 혼과 조 형제의 조용히 전달되는 응원만으로 충분했다. 이번엔 우리가 이들을 도울 차례였다.

사실 한과 영은 우리를 도울 수 없었다. 한은 천천히 어른이 되는 쪽으로 나아갔고, 영은 학교로 걸어갔다. 중도 이탈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식의 말대로 가진 힘에 비해 무모한 반전을 꿈꾸는 짓은 객기였다. 아직은 용기와 힘의 균형을 맞추는 과정을 겪는 게 현명했다. 한과 영은 아무 생각도 없이 소속을 택하는 인간들과 달리 두렵지만 언제나 원치 않은 이름을 버릴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강식을 빼오기도 이젠 수월했다. 처음으로 연이를 봤다. 내가 본 여학생 중에 이목구비가 가장 뚜렷하며 늘씬하게 뻗은 목과 팔다리는 매혹적이었다. 여전히 대문은 미동조차 없었지만 안쪽에선 겨울바람이 요동쳤다.

내가 문 앞에 도착하면 강식은 연이에게 짖었다. 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나를 보더니 순순히 강식을 내보내줬다. 나와 그녀는 초면이었지만 그녀의 애틋한 눈동자는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두 번째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장소를 정해야 했다. 계속되는 ‘지금’의 의견에 후보군이 다양했다. 한 가지 특징은 있었다. 우리를 봐줄 인간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곳이었다. 사거리의 횡단보도, 상가 중앙의 광장, 학교 앞, 공원, 방송국 앞 등 여러 가지 안건이 나왔다.

“자. 장소 후보는 충분해요. 다음 회의가 시작될 땐 반드시 한 곳을 정해야만 해요.”
강식이 교통정리를 했다. 아까 집에서 나오기 전 혼의 이동날짜가 보도됐다. 28일 뒤 오후 두 시에 혼은 병원에서 법원으로 이송된다. 죄를 심판하는 인간들이 그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는 알 수 없었으나 혼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란 직감이 들었다.

뉴스에서는 그의 여러 사건 중 총성을 울린 것이 가장 무거운 죄라 떠들어댔다. 살인미수니 아니니 하며 토론하는 소리도 들렸었다. 하루만 인간이 되고 싶었다. 인간 중에 그의 작전을 아는 자는 없었으니 아무도 혼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재산피해와 납치로 인해 혼에 대한 신뢰는 이미 바닥이었다.

“우리의 최종 장소엔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어요. 인간이 많이 모여드는 것도 중요한데 우리가 혼을 볼 수 있고 혼도 우리를 볼 수 있어야 해요. 병원에서 법원 사이든, 법원 앞 정도로 생각해 봐요.”

강식이 추가한 조건은 자칫 공포를 심어줄 법했다. 일반인간들은 힘으로 이길 수 있었지만 혼의 근처는 다를 테다. 무장한 경찰들과 경호원들이 사방에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식은 단호했다.


회의가 없는 날이면 한의 집에서 뉴스를 들었다. 개라고 다르지 않았다. 나도 리모컨 버튼 하나만 누르면 TV는 작동했다. 뉴스는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혼이 병원으로 실려간 이후 한과 영은 바빠서 집에 없었다. 한은 센터 털이범의 누명을 씻어냈고 다시 일자리를 구했다. 전 가게의 사장은 임금체불로 영업 정지를 당했다. 특별하진 않았지만 최대 규모의 배달 회사에 라이더로 취직했다. 영은 다시 학교를 다녔다. 도둑놈에서 영웅으로 불렸다. 학생들은 극성맞은 아줌마를 대신 이겨줬다며 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혼의 거처에 대한 뉴스는 없었다. 혼의 성장 환경과 사회의 시선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만 그가 등장했다. 대개 ‘혼의 총성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혼을 향한 총알은 어디로 날아가야 하는가’식의 얄팍한 정보만으로 인간들의 관심을 끌었다.

오후엔 혼자 혼이 입원한 병원에서 법원까지 답사를 갔다. 강식이 덕분에 내 인기는 식었다. 강식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대신 강식은 작전의 순서나 대열, 필요 물품과 같은 세부적인 요소를 점검했다. 나보단 강식의 상상력이 넓고 정확했다.


병원 앞은 시끄러웠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켜고 응급실로 돌진했다. 산책하는 인간들도 많았지만 장소로 적합하진 않았다.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든 인간들이 우리의 행진을 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또 사경을 다투는 응급환자의 이동길목을 차단하여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상황은 바라지 않았다. 분명 복수와는 달라야 했다.

병원에서 법원까지는 버스 정류장으로 열 두 정거장이었다. 동네 자체가 크지 않았으며 주요 기관들은 오목조목 붙어있었다. 정거장 사이의 거리가 내 걸음으로 오 분 정도였다. 다만 가는 길엔 상가들이 모인 단지가 두 곳이나 있었고, 학교도 많아서 주의해야 할 곳이 몇 군데 보였다.

병원에서 가장 먼저 보인 곳은 첫 번째 상가 광장이다. 평균 2층 높이의 상가들이 오각형의 형태로 들어서있고 가운데는 조경과 벤치 서 너 개가 있었다. 주로 상가엔 식당과 카페, 옷집이 다수여서 인간들의 수와 연령은 적당했지만 접근성이 좋지 않았다. 큰 도로가에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와야 했기에 혼이 이곳까지 보는 건 무리였다.

저번 회의 때 말한 학교도 병원과 가까웠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부 담 하나를 두고 일렬로 맞닿아 있었다. 큰 도로를 따라 정문이 위치해 접근성이 좋았다. 인간들 중에서도 학생들이 우리에겐 가장 완벽한 관객이었다. 나도 대상이 된 적이 있었지만 그들의 유튜브 파급력은 뉴스보다도 빠르고 강력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설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곧이어 두 번째 광장이 도로 한복판에 마련되어 있었다. 원형의 회전 교차로 안쪽 공간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벤치와 테이블도 있으며 식수대와 화장실 그리고 작은 원형의 무대도 있는 쉼터였다. 교차로 위쪽으론 다섯 방향으로 다리를 내린 육교가 놓여 있었고 육교의 끝은 높은 건물들과 연결됐다. 이 동네에서 가장 큰 건물들이자 항상 인간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인간들, 건물 안에서 밥 먹는 인간들, 쉼터에서 쉬는 인간들, 육교를 건너는 인간들, 상가에서 쇼핑하는 인간들은 못해도 우리 수보단 많았다. 무엇보다 경찰차를 타고 이송되는 혼이 볼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법원으로 가기 위해선 무조건 이 교차로를 지나야 했다.


법원의 입구는 사장의 저택과 닮았다. 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뚫려있긴 했지만 건물 자체의 그림자는 나를 압도했다. 심지어 경비가 입구의 양쪽에 앉아 있어서 보안도 철저했다. 되도록 들어오지 말라고 압박했다. 외벽의 코너를 돌아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화단의 나무 밑에 숨어 관찰했다. 가운데에는 회전 교차로 모양의 둥근 풀밭이 무덤처럼 덮여 있었다. 그 위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동상이 굳건히 서 있었다.

혼은 이곳을 통과해 으리으리한 저 건물로 들아가게 되겠지. 저곳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겠지. 생각할수록 사장의 집이 떠올랐다. 그곳에서도 열흘 간 자신의 삶을 일면식도 없는 인간으로부터 허락받았다. 내가 갈 곳을 다른 사람한테 맡긴다는 걸 아는 순간의 심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비참하다. 괴롭다. 이런 단어로 담기엔 그 어둠이 턱 없이 컸다.

혼이 저곳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할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거다. 철창만 없을 뿐 혼은 갇혀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다행이라면 나처럼 죽음을 담보로 하는 계약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법원 역시 두 번째 광장만큼이나 우리의 작전 장소로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더 좋은 요건을 지녔다. 혼이 멈춰 선 상태로 우리를 볼 수 있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환영처럼 사라지는 우리의 모습보단 천천히 대열에 맞춰 움직이는 우리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에게 끔찍한 철창을 불러일으킨다는 맹점이 있었다. 과연 이곳에서 우리 중 단 한 명이라도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혼만 보고 걸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keyword
이전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