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가
“기억이 나를 나라고 인지하게 만드는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소개할 때 이름이나 직업, 성격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기억’이 놓여 있다 어린 시절의 웃음소리 첫사랑의 설레던 감정 부모님이 건네준 따뜻한 위로 그리고 힘겨운 시절 내 곁을 지켜주던 이들의 손길 그런 것들이 모여 ‘나’라는 하나의 존재를 빚어낸다
그런데 만약 그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는 여전히 나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걸까
이 생각은 곧 관계로 이어졌다 내가 누군가를 또렷이 기억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여전히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닌 걸까?
머리로는 안다 그가 살아온 시간과 몸 그리고 정체성은 변하지 않았으니 여전히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다르게 반응한다 나는 그와 함께 나눈 대화, 웃음, 갈등, 눈물까지 다 기억하는데 그에게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면 관계는 기울어지고 만다
나 혼자만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허공에 손을 뻗는 듯한 기분 이럴 때 서운함과 아픔을 느끼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관계라는 건 결국 두 사람이 함께 쌓아 올린 기억의 탑인데 그중 한쪽이 무너져버리면 남은 사람은 무너진 자리를 홀로 지켜야 한다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내가 아는 기억과 그 사람의 기억이 어긋나 있다 그건 누구의 잘잘못이 아닌 그냥 이제 그렇게 서로 인지하게 된 것이다
삶은 길지 않다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관계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비어버린 공간이 더 아프다 나는 그 공간을 바라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저려온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스스로를 확인하고 또 기억을 통해 서로를 이어간다 기억이 공유될 때 관계는 단단해지고, 기억이 어긋날 때 관계는 흔들린다
그렇기에 비어버린 자리가 아프다고 해서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그만큼 진심으로 관계를 살아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 빈 공간을 느끼며 살아간다 아프고 허전하지만, 그 자리 덕분에 내가 얼마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의지했었는지, 그리고 그만큼의 삶을 진심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언젠가 또다시 새로운 기억들이 쌓여 그 자리를 채워줄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