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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용 Nov 18. 2022

기울었다

‘어머, 너 몸이 기울었어.’ 함께 길을 걷던 이가 별안간 놀라며 내 등과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 불안정한 자세였나 싶어 지나던 건물의 유리문에 비친 실루엣을 슬쩍 흘겨보니 정말 구부정하게 기운채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려 멍하니 그쪽으로 이끌려가는 사람처럼. 의식적으로 등을 곧추 세우고 걸은지 얼마나 됐을까, 어느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기울고야 말았다. 물론 몇십 년 그렇게 살다 굳어진 것을 단 몇 초의 신경으로 바로 고친다는 게 무슨 도둑놈 심보인가도 싶었으나, 그와 별개로 난 학습능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간임에 틀림없었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도 했고 새로운 동네에 적응도 했겠다, 마음이 괜찮다니 이제 몸만 괜찮아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시작하고 한 달이 넘도록은 자세 교정만 배웠다. 선생님은 좋지 않은 자세의 원인이 아무래도 자전거 같다고 말씀하셨다. 자전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따릉이로는 도저히 성에 차질 않아 작년 여름 고가의 자전거를 샀다. 그러니까 고가의 자전거라 함은 무릇 자전거를 제대로 타는 이들이라면 있을 법한 자세를 숙여 타는 자전거였다. 공기의 저항을 최대한 줄이고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기 위해서라지만, 조금의 위험부담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역시 따릉이보다 훨씬 힘이 좋아 말 그대로 타는 맛이 났달까. 한여름 우이천을 따라 시원한 밤바람을 맞이하며 달리는 일은 퍽 굉장한 위로였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 의지대로 속력을 내고, 그러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일이 얼마 없는데, 자전거만은 그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한동안 참 열심히도 달리다 강북을 떠나 관악으로 정착한 뒤로는 또 한참을 달리지 않았는데도 자세가 잘못되었다니.


몸이 기운 반대 방향으로 근육을 뒤틀고 구기고를 반복해 겨우 많이 좋아졌다는 칭찬을 들었거늘, 고작 길을 걷는데 그간의 연습이 아무 소용없어졌다는 게 스스로도 형편없게 여겨졌다. 그나마 내가 스러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건 그만큼의 균열을 감당할 수 있도록 발달한 다른 근육 덕분이라는 트레이너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의 몸은 하나지만, 그 안에서 서로가 무너지지 않도록 치열하게 싸우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래,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것이 꼭 안 좋은 쪽으로만 영향을 주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영영 자전거를 타면 안 되는 것일까 덜컥 겁이 나고야 말았다. 다행히 선생님은 몸이 원래의 바른 자세로 돌아오면 다시 자전거를 타보라고 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팠던 수많은 날들의 요동치는 마음을 애써 눌러왔는데, 글쎄 기울었단다. 순간의 서글픔은 그날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이제 다른 근육마저도 나를 포기한 걸까, 걱정으로 일렁이는 상태로 자전거를 탈 수 있을까, 잡념들로 밤을 온통 헤맸다. 마음이 괜찮아진 줄 알고 몸으로 넘어온 것이 화근인 듯했다. 기울어있는 마음이 바로 서지 않는 이상 몸도 마음을 따라 언제고 기울 것이 뻔했다. 몸은 마음을 이길 수 없어서다. 마음이 기울었는데, 몸이 어찌 기울지 않을 수 있을까. 선생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학생은 제멋대로 자전거를 타려 새벽에 집을 나섰다. 마음이 기운 방향으로, 몸이 기운 방향으로 정해진 목적지 없이 두어 시간을 달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금기를 어기고 나서 깨달았다. 부러 기울지 않은 채하는 것으로 기운 것이 나을 리 만무하다는 거. 아직은 나의 반경에 그가 너무나도 만연해있다. 어딜 가도, 무얼 보아도, 무얼 먹어도, 무얼 들어도, 그것에 그가 서려있다. 그래서 그리도 기운 것이다. 내가 가고, 보고, 먹고, 들은 것에는 항상 그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혼자 버틸 재간이 없다. 기운 것을 지탱해줄 다른 근육이 쓴 지 너무 오래되어 말랑해졌고, 혼자를 기르는 법을 까먹은 나는 그 근육이 해주던 일을 대신하던 그가 없으니 자꾸 의지할 그가 아직 있을 것만 같은 쪽으로 기운다. 얼마나 많이 마음을 반대 방향으로 뒤틀고 구겨야 본래의 상태로 돌아올지는 알 수 없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무책임해서 싫지만, 그만한 약이 또 없음을 알고 그저 버틴다. 단어도 참 애처롭다. 기, 울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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