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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용 Nov 18. 2022

숨,

까득 아팠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몽롱함 속에 어렴풋한 고통의 농도가 점차 진해져 갔다. 설마 아닐 거라 부정하며 애써 몸을 좌우로 뒤척여 자세를 탓하려 해보지만, 그럴수록 마취는 풀리고 아픔은 명확해진다. 숨은 전혀 쉬어지지 않았고, 목은 모래를 한 움큼 삼킨 듯 꺼끌거렸다. 그제야 나는 아픔을 인정했다. 소리 내어 아프다는, 죽을 것 같다는 말을 내뱉은 게 얼마 만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정말 오랜만에 아픔이 찾아온 건지 아니면 아픔에 승복한 것이 오랜만인지, 웬만한 아픔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나로서는 까마득한 무기력이었다. 실은 전부 내 책임이다. 급작스럽다기에는 이미 전날 밤 어느 정도의 전조가 분명 있었다. 하루에 절여진 고된 몸을 편히 뉘었는데, 갑자기 한쪽 숨구멍이 턱 막혔다. 누군가에게 당연할지 모르는 숨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게도 막히는 일이 잦았기에 구비해둔 약을 먹고 하룻밤의 고비를 무의식에 떠넘기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몸은 편법이 통하지 않는다. 나만큼이나 나에 대해 무관심한 인간이 있을까 아주 잠시 괴로워하다 까무룩 쓰러졌다. 십분 정도 어지러움을 헤매고 다시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켰다. 어제 먹었던 약을 하나 더 억지로 삼켜내고 집어넣었던 두꺼운 이불을 옷장 위에서 꺼내 덮었다. 얼마큼 잤을까, 다행히 숨구멍은 아주 조금의 틈을 내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열과 함께 목의 고통은 여전했다. 그저 지나가는 늦봄의 지독한 감기겠거니, 편의점 약으로 하루를 버텼다.


그래도 약을 먹고 하루 종일 잠을 청해서인지 온 몸의 근육이 긴장을 풀고 나아지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래도 병원에 가야 할까, 백 번쯤 고민하다 결국 발걸음을 옮겼다. 나를 잘 아는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러니까 어쩌다 보니 내가 글을 쓰고 스트레스를 잘 받는 편임을 고백해게 된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꿰뚫어 본다. 정확히는 지나치게 솔직한 몸을 들여다보는 거겠으나, 나는 언제고 그에게 스스로에게 가했던 혹독함을 들켜 죄책감에 사로잡히곤 한다.‘오늘은 비염만 심각한 게 아니네요. 많이 힘들었을 텐데, 고생했어요.’그에게서 고생이라는 단어를 듣자고 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픔의 원인이 나의 소홀함이 아니라 혼자를 묵묵히 견뎌온 고생일 거라는 진단이 절실했다. 묘한 안도감과 더불어 그의 희박한 따듯함만으로도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숨구멍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살들의 몸집은 잔뜩 부풀어 있었고, 목구멍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예전이야 정확한 이유가 무언지 딱 하나를 밝혀내고픈 마음에 질문을 던지곤 했지만, 이제는 아픔이라는 현상의 근원은 하나일 수 없음을 깨닫고 이런저런 것들이 원인이겠거니 알아서 어림짐작해본다. 찬바람 쐬지 말 것, 담배 태우지 말 것, 알코올이나 카페인을 줄일 것, 언제나처럼 조심해야 할 것들을 찬찬히 일러주신다. 서둘러 일어나려던 차에 가장 중요한 조언이 날아온다.‘스스로를 잘 돌봐야 해요.’그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약으로 처방해주시면 아침 점심 저녁으로 잘 챙겨 먹어 볼게요. 현대 의학의 위대함으로 언젠가는 마음도 약으로 치유되는 날이 있을까 기대를 걸어보지만, 당장의 되지도 않는 응석은 겨우 참아내기로 했다.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진료실을 나섰다. 병원을 가야하나 고민했던 것이 괜한 고집으로 여겨질 만큼 몸 상태는 빠른 속도로 나아졌다. 


꼬박 이틀을 집에만 있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는 혹여나 나태해질 스스로가 지레 꼴보기 싫어 부지런히 돌아다녔던지라 좀체 어색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나마 죽을 시켜 먹고 나니 생기가 돌았다. 고개를 돌릴 여유가 되어 멍하니 기르는 식물을 쳐다봤다. 나의 유일한 동반자, 종종 우리가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며 생경한 풍경을 상상한다. 식물의 세포도 말을 알아듣는다는 연구 결과를 어디선가 들은 후로는 꼭 물을 주며 긍정적인 말을 들려주려 노력한다. 그럴 때면 너도 나와 같이 돌봐주는 인간이 있어 외롭지는 않은지, 행복하기는 한 건지 궁금해진다. 요즘은 나도 챙겨 먹지 않는 영양제를 물에 녹여 주에 한 번 골고루 뿌려주는 중이다. 때가 되면 잎이 지고 새 잎이 돋아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겠으나, 다시 핀다고 지는 것을 아쉬워 말라는 건 마음이 미어지는 말이다. 내게 온 이유가 있을 테니 부디 못난 주인을 닮아 아프지만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시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바라본다. 고작 며칠 아팠다고 파리해진 몰골이 새삼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광주 촌놈이 어쩌다 서울권 대학에 붙어 스물에 서울에 올라왔으니 어느덧 십 년 차가 되어간다. 매번 세어보는 건 아니지만, 양손가락을 모두 접고 나니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 흘렀구나 싶었다.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혼자 산다는 거 항상 남들은 짠하게 바라볼지라도 난 아무렇지도 않다고 당당한 척 말해왔는데, 어떻게 서울생활을 그럭저럭 헤쳐나가고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사람 때문에 외롭고 지치지만, 또 사람 때문에 견디고 이겨내는 거겠지. 그저 모두 다 잘 됐으면 하는 간절함만 걸러졌으면 좋겠다.


아프지 마라, 내 곁을 지켜주는 이들에게 버릇처럼 되뇌는 말이다. 생생한 놈이 하는 말이면 싱거운 소리 정도겠으나, 희귀병을 두 번쯤 앓았던 놈이 하는 말이니 보통보다야 와 닿는 면적이 넓으리라. 그 애늙은 덕담을 주문처럼 곱씹을 걸 그랬다. 혼자라는 것이 실제로 외로운지 아니면 적막에 파묻혀 외롭다는 착각이 드는 건지 구분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혼자를 기르다 아프면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나를 돌봐줄 사람이 나밖에는 없는데, 나마저 아프면 한참을 앓다 외로움마저 물밀듯 밀려와버려서다. 주위에 말하는 건 걱정을 지어주는 일이고 말하지 않는 건 너무나도 애달픈 일이니, 그간 갖은 고생은 다 도맡아온 애꿎은 혼자의 탓을 하는 어리석은 결론에 도달하고야 만다. 그냥 아무런 생각 말자. 눈을 감고 숨을 크게 쉬어본다. 숨 끝에 온점 대신 반점을 찍고 다음 숨이 있음을 느낀다. 아직 목과 가슴이 아리지만, 그래도 숨을 쉴 수 있음에 감사한고 당연한 것이 내 품에 돌아왔음에 안심한다. 그리고 잠시 멈춰 생각한다.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그리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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