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어진지 이십 년이 넘어가는 연로한 아파트의 나이 듦은 겉으로 훑는 것만으로 티가 나지 않는다. 살아가는 사람들의 편리에 따라 꾸준하게 보수가 이루어져서다. 우리 집의 경우에도 이미 입주 전 미리 도배며 청소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전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었는지에 대한 잔상이 궁금하기도 했으나 아쉽게도 기회를 놓쳤다. 오히려 공간이 지나온 세월의 흐름은 주변 상가에 새겨져 있다. 주인이 바뀌지 않은 채로 오랫동안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장소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게는 세탁소다. 좁고 낡은 계단을 한층 반 올라가면 앞이 뻥 뚫린 복도에 꺠끗히 세탁된 옷들이 비닐에 싸여 걸려있다.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익숙한 수증기 내음과 함께 아저씨께서 다리미를 쥔 채 반겨주신다. 색이 바래려는 흰색 와이셔츠를 들고 갔더니 아저씨께서 그러셨다.
‘흰옷은 한 번만 입어도 빨아줘야 해요. 참 까다로운 녀석이죠.’ 흰옷을 즐겨 입는 사람들은 부지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고 나서의 번거로움을 알고도 감행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내 마음은 아직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몸처럼 마음도 색이 바래고 주름이 늘고 허리가 굽고 덩치가 준다. 괜찮던 것들이 괜찮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아무렇다. 그래도 방치하지 않고 빨아야겠다고 집을 나섰으니 누렇게 변하는 건 겨우 막았다. 자주 입던 옷은 아니지만 세탁소에 가지고 가길 잘했다. 동호수를 말하고 언제 가지러 올까요 했더니 직접 오시겠단다. 바깥에 세워진 자전거에 행거가 달려있는 걸 보니 아마 아파트 단지를 도시며 가져다주시는 듯했다. 여러모로 지나가버린 시절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신호등 빨간불에 가만히 멈춰서 세탁소를 지긋히 바라보는 일이 늘었다. 얼마가 지나고 다시 동네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날이 온다면 가장 먼저 그리워할 장소는 집보다도 세탁소일 거다. 나는 아직까지 새로운 것보다 닳아있는 것이 좋고, 편한 것보다 손을 타는 것들이 좋다. 흔적을 지우고 다시 흔적을 남기는 행위를 되풀이하며 익숙함에서 탈피하는 것이 좋다.
혼자 성수에 있는 카페에 가던 길이었다. 하루가 오롯이 내 것으로 돌아온 이후로 지하철보다 버스를 타는 날이 늘었다.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노래를 들으며 창밖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게 좋다.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맨날 가던 길을 보고 았노라면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달라진 거라곤 나뿐이겠지만. 바쁘게 살며 놓치고 다녔던 것들이 참 많구나, 열심히 걷고 바라보며 한탄한다. 상왕십리역에 내려 지하철 2호선으로 환승하고 성수 역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는다. 중간쯤 내려가는데,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내 뒤꿈치로 둔탁한 물체가 부딪혔다. 흠칫 놀래 뒤돌아보니 뒤에 서있던 아저씨께서 연신 죄송하다며 기다란 통을 서둘러 주우셨다. 이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러시냐며 웃어 보이고 연신 괜찮다는 손짓을 내보였다. 카페에 들어가 두어 시간 책을 읽다 대학 후배와 저녁 약속이 생겨 회기로 향했다. 그런데 나를 보자마자 다리가 왜 그러냐며 발꿈치를 가리켰다. 왜 그런고 하니 새까만 기름때가 바지 밑단과 발뒤꿈치에, 심지어 양쪽에 전부 묻어있었다. 물티슈를 꺼내 힘껏 문대 봐도 검어지는 영역만 확장될 뿐, 도통 기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막막하고 속상했다. 선의를 베풀었을 때 아저씨께서는 어째서 바지에 기름때가 묻었다는 걸 말해주시지 않았는지, 그것보다 근래 자주 입던 청바지가 원래대로 돌아올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와 꼬박 하루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세탁소에 들렀다.
‘총각, 이거 세탁기에 빨아도 되는 거예요. 괜히 돈 쓰는 거 아니야.’
‘여기 기름때가 묻어서요.’
‘아, 이제 봤네. 힘들었겠어요. 금방 세탁해서 가져다 줄게요.’
이틀이 지나고 현금 만원을 인출해 바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느지막한 오후가 되어 아저씨께서 원래대로 돌아온 청바지를 들고 집에 오셨다. 차가운 물 한 잔을 건네드리고 돈을 드리려 얼마냐고 묻는데, 아저씨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멈칫거리다 삼천 원이라고 말하신다. 딱 떨어지는 가격이 정해져 있을 텐데도 어떤 이유에서 망설이셨을까. 조심스레 왜 그러시는 거냐 여쭈었다. ‘ 원래 뭐가 묻어온 건 더 받는 게 맞는데, 그냥 삼천 원만 받을게요. 다음에 제값에 줘요.’ 혼자 사는 젊은 총각이 짠하셨는지 싹싹한 청년이 마음에 드셨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허튼소리가 올라오려는 바람에 제대로 된 감사 인사도 하지 못하고 서둘러 문을 닫고 아저씨를 보냈다.
‘얼마를 더 받으셔도 좋아요. 제 마음에 묻은 것들 좀 싹 다 빨아서 하얗게 만들어주실 순 없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