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와는 내가 첫 번째로 다녔던 대학에서 만났다. 뚜렷한 숫기가 없던 우리였지만, 동아리의 막내급 생활을 함께하며 나름의 유대를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새롭게 옮기고서부터 더욱 정분을 견고히 다졌다. 같은 곳에 있을 때보다 떨어지고서 그가 떠오르게 되니, 어쩌면 나는 알게 모르게 그를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직까지 간간이 만나며 공백의 마디에서 읽어낸 것들을 공유하며 서로의 영감 따위가 되어주고 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모처럼 여유로운 휴가를 맞아 P의 퇴근 시간에 맞춰 우리의 모든 추억이 깃들어 있는 거리에서 만났다. 주종을 맥주로 선정한 날이었기에 우리는 그것과 곁들여 먹기 좋은 치킨을 파는 가게로 들어가 미뤄두었던 생각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앞서 인연을 꽤 거창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사내 둘이 모여 이야기할 만한 주제라고는 여자와 군대 이야기뿐이니, 우리도 별 다를 바는 없었다. 마침 이번 공백에서는 둘 다 이성과 찰나의 불꽃이 있었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가자, P는 문득 자신이 군 복무 시절 흥미롭게 느꼈던 생각거리를 꺼냈다. 운전병으로 복무 중이던 그는 운전에 무뎌질 즈음에, 한 번은 도로 위에서 내비게이션을 보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소감은 퇴근 후 마셨던 맥주의 첫 모금보다도 소름 돋게 청량했다.
“내가 길을 찾느라 헤맸던 여러 갈래의 길들을 선으로 표현하면 그게 나무의 뿌리 모양처럼 보이더라. 결국 이곳저곳을 헤매어야만 더욱 견고한 뿌리를 가질 수 있었던 거지.”
청춘에게 방황은 필연적임과 동시에 필수적이다. 간혹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이들은 얼른 확실한 기둥을 세우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당장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헛수고라고 느끼는 그것이 분명 거름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젊다는 것은 청춘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삶의 백병전에서 자신의 무기를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는 장수가 이겨낼 수 있을까.
기억을 더듬어 지도를 펼쳐본다. 아직도 생생하게 아린 길들을 떠올려본다. 어쩌면 순간에 낭비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지금 나를 지탱해주는 뿌리의 한 가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아가 머릿속을 살며시 건들며 지나가는 방황의 시간마저 애틋하게 바라봐본다. 이제는 스며든 지 오래되어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눈물을 인정해본다. 결국 나는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잘’ 살아가고 있었나. 그렇다면 두려울 게 무엇인가?
그렇다고 찾아오는 아픔과 슬픔을 거스르려 애쓰지는 말자. 상처에서 비롯한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상처 혹은 상처를 선물하고 떠난 이를 미워하지는 말아보자. 그 역시 언젠가 우리의 무늬가 될 테니, 미운 만큼 얹어 더욱 사랑해보자. 그 모든 것들이 이 극의 서사가 무척이나 아름다울 수 있도록 장식해줄 것이니 말이다.
기억하자. 내가 이토록 달리는 이유가 단지 오늘 창밖으로 스쳐 가는 것들을 구경하기 위함인지, 결연한 마음으로 정성스레 지도에 점찍어둔 그곳에 도달하기 위함인지.
나는 젊고 어리다.
그리고, 젊음이 가는 길에는 소중함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