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진 Nov 13. 2024

생각에 관한 생각

글을 쓰는 이유 - 첫 번째


생각을 생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혹시 능력이 된다면 사상을 남길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삶의 어느 지점에선가 ‘나는 평생 우주 쓰레기만 생산하다가 죽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허무주의에 빠진 것인데, 우리가 아등바등 생산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집, 차, 가방, 스마트폰, 혹은 다른 누군가를 돕기 위한 서비스 같은 것들. 물론 미시적 관점에서는 다 돈이 되는 가치 있는 것들이겠지.

그런데 고차원적 관점, 예를 들어 범지구적 차원에서 보자면 그 모든 것들이 무가치하다.

애초에 우리는 100년을 겨우 살고 죽어 없어질 존재들이 아닌가. 이 찰나의 편의와 연명을 위해 생산되는 산물들이 가치를 갖는다 생각하기 어려웠다.


이왕에 사는 거,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사람이 생산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일신의 편의와 연명을 위해 생산되는 게 아니면서, 내가 죽어 없어지더라도 여전히 가치를 가질 그런 것 말이다.


나는 '생각'이라는 결론에 닿았다.




1. 생각이란 무엇인가?


생각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뜻의 범위가 대단히 포괄적이기 때문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 같다.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해 부연하자면, 이것은 '출력값'으로서의 생각을 의미한다.


AI 서비스를 예로 들면 '출력값'의 의미를 보다 직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함수, 인공지능 모델, 그리고 우리 뇌가 구조적으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

당연한 이치다. ChatGPT와 같은 대형 언어 모델(LLM)은 언어를 변수로 하는 함수라 정의할 수 있고, 이 모델의 학습 방법론은 뇌의 방식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역으로 설명하면 인간의 학습 방식은 수학적 모델로 표현할 수 있고, 이것은 다시 함수로 정의할 수 있다.

즉, 학습하는 인간으로서 나는 입력값을 받으면 출력값을 내어 놓는 함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AI 서비스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다. 어떤 데이터를, 어떤 알고리즘을 통해 학습시켰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그림을 얻고 싶다면 ChatGPT가 아닌 다른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물론 ChatGPT를 통해서도 훌륭한 그림을 얻을 수 있겠으나, 특화된 AI 서비스를 통하면 더 나은 그림을 얻을 수 있다.

이를 방증하듯, 이용 목적에 따라 AI 서비스를 구분하는 표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Source: @choi.openai

이 표를 보고 있노라면, AI 서비스들이 놓인 자리를 각 영역의 대가들로 채워 넣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글쓰기에는 한강 작가, 영상 생성에는 봉준호 감독, 그림에는 김환기 화백, 연구에는 허준이 교수... 뭐 이런 식이랄까.

그렇다. 내가 보기에 인간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학습한 인공지능 모델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대학에서 오랜 시간 공부한 누군가는 해당 분야의 지식을 입력값으로 학습한 모델이 되겠고, 수없이 많은 영화를 보며 자라난 또 다른 이는 영화를 입력값으로 학습한 모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각 영역의 대가가 된다는 것은 해당 모델을 통해 나온 출력값이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보일만한 가치를 갖는다는 의미리라.


평생에 걸쳐 학습한 '나'라는 모델이 내어 놓은 출력값.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생각의 의미다.




2. 왜 생각이 가장 가치 있는 산물이라고 생각하는가?


객관적인 기준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이 생산한 것들의 가치를 세 가지 기준으로 평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산물이 창출한 효용의 크기가 더 큰가?

한계효용이 체감할 것이므로, 꼭 필요하면서 대체하기 어려울수록 더 큰 값을 가질 것이다.

2. 산물이 창출한 효용의 범위가 더 넓은가?

더 많은 대상에게 효용을 줄수록 그 범위가 넓어질 것이다.

3. 산물이 창출한 효용의 지속 시간이 더 긴가?

효용 창출 여부가 시간 의존적이지 않으면서 무형의 산물일수록 더 오랜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 기준에 따라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들을 평가하다 보니, 생각이 가장 가치 있는 산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대충 이런 느낌

예를 들어 원시의 누군가가 최초로 생각해 낸 시간/화폐의 개념이라거나, 근대 어느 사상가가 떠올린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들. 모두 인간사의 패러다임을 뒤바꿀 만큼 그 크기가 컸고, 당대뿐 아니라 후대의 전인류에게까지 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들이다.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들 중 이보다 더 큰 가치를 갖는 것을 나는 찾을 수 없었다.




3. 어떤 생각을 생산하고 싶은가?


그럼 생각이기만 하면 되는가?


당연히 모든 생각이 가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사람이 매일 쏟아내는 생각의 총량을 고려한다면 단위당 가치는 오히려 전무한 수준이라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른다.


배고프다는 생각, 주말 계획에 대한 생각,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같이 우리가 내어 놓는 대부분의 출력값들은 효용의 크기, 범위, 지속시간의 관점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차등 가치를 갖는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생각에도 '급'이 있는 법이다.


최진석 교수의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보면 생각의 급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대 예술 거장의 작품을 직접 본 경험이 있는가?

혹은 예술적으로 우수하다 평가받는 영화나 공연을 감상한 적이 있는가?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갖고 있지 못할 것이므로 장담하건대,

왜 그것이 우수한 작품이라 평가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나 감독의 명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면, 당신은 그 작품을 졸작이라 평가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그 작품을 걸작이라 칭송한다.


최진석 교수는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이런 현상을 '사유의 시선'과 '생각의 높이'로 설명한다.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더라도 같은 생각을 해내지 못한다.

누구나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는 법이다. 생각이란 앎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것, 이것이 사유의 시선이다.

그리고 더 *많이 아는 것, 이것이 생각의 높이다.

*관용적 표현으로 더 많이 안다는 표현을 썼는데, 여기서 많이 안다는 것은 양이 아닌 질적 관점이다.

대충 탁월한 사유의 시선 한 짤 요약

내가 거장의 예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 보는 눈, 즉 내 사유의 시선이 전문가들의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내 사유의 시선이 전문가들의 것보다 못한 이유는 내 생각의 높이가 그들보다 더 낮기 때문이다.

역으로 나보다 생각의 높이가 더 낮을 누군가, 예를 들어 어린이나 아기들은 나보다도 그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앞서 언급한 생각의 급은 바로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설명하는 생각의 높이 차이를 의미한다.


나는 급이 있는 생각을 생산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각의 높이를 높여야 한다.




4. 생각의 높이는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


생각의 급, 즉 높이에 대한 개념을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찾을 수 있었다면,

이를 높이는 방법은 바바라 민토의 '논리의 기술'에서 찾을 수 있다.


바바라 민토는 인간의 생각이 언제나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생각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은 언제나 다른 생각과 수평적이거나 수직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예를 들어 A가 "슬슬 저녁을 먹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가정하자, A가 의식하고 있든 아니든 이 생각은 다른 생각과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수평적/수직적 관계를 맺고 있다.

A의 머릿속 생각 구조

여기서 "슬슬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해당 피라미드의 최상단 즉, 핵심 생각이다. 그리고 나머지 생각들은 핵심 생각을 뒷받침하는 보조 생각이다.

A는 뜬금없이 핵심 생각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다른 보조 생각들이 수평적으로 모인 결과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이 생각들 또한 다른 하위 피라미드로부터 파생되었거나, 새로운 상위 피라미드를 파생하게 된다는 점이다.

생각은 언제나 다른 생각과 수평적이거나 수직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새로운 피라미드의 최상단에 위치한 "오늘 저녁 메뉴는 닭밥이다."라는 핵심 생각은 언뜻 보기에 단순한 생각처럼 보일지 모르나,

이 핵심 생각이 아래에 위치한 수많은 생각들을 포괄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주 복합적인 생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바라 민토의 피라미드 프레임워크 덕분에 우리는 머릿속에서 생각이 어떤 형태로 관계를 맺는지, 새로운 생각이 어떻게 파생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이 원리에 기반하여 생각의 높이를 높이는 방법을 찾아냈는데, 바로 탑을 쌓아 올리는 것이다.


민토의 피라미드는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1. 인간의 머릿속에서 생각은 언제나 피라미드 구조로 관계를 맺고 있다.

2. 피라미드 구조에서 상위 생각은 하위 생각들로부터 파생된 복합적인 생각이다.


그렇다면 '급' 있는 생각은 어떻게 생산되겠는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 급 있는 생각은 다른 급 있는 생각으로부터 파생되는 것 아닐까?

가치 있는 하위 생각들이 더 가치 있는 상위 생각을 생산할 수 있다면, 이것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높이를 점차 높일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오직 가치 있는 생각들로만 구성된 피라미드를 상상해 보자(나는 이것을 생각의 탑이라 부르겠다).

앞선 '닭밥의 예'에서 퇴근 시간에 임박했다는 사실, 상사와의 커뮤니케이션 경험, A가 학습했던 근합성과 관련된 지식이 모여 닭밥을 먹겠다는 상위 생각을 이끌어 냈다.

이렇듯 이 시대의 객관적 사실, 내가 겪은 여러 직/간접 경험, 내가 학습한 다양한 지식들 또한 또 다른 새로운 상위 생각들을 생산해 낼 것이다.

이 경우 새롭게 생산된 상위 생각들은 다양한 생각들이 결합된 만큼 하위 생각들보다 최소한 더 다차원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다차원적 생각들이 모여 새로운 생각을 생산할 때, 더 넓은 관점에서 더 깊은 통찰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 가치 있을 가능성이 높은 생각들을 생산하다 보면, 그리고 능력과 운이 따라 준다면,

언젠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생각의 정수인 '사상'까지도 생산해 낼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생각의 높이를 높일 수 있는 방법론, 생각의 탑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5. 나는 왜 글을 쓰고자 하는가?


이 선언을 위해 여기까지 긴 글을 써내려 왔다.


나의 꿈은 생각을 생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꿈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생각이 무엇인지, 왜 생각을 생산하려고 하는지, 어떤 생각을 어떻게 생산하겠다는 것인지를 설명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산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마저 설명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생산은 수요를 전제로 한다.

수요 없는 생산은 없다. 그런 건 생산이 아니라 뭐랄까 의미 없이 싸지르는 것(?)이라 불려야 할지 모른다.

즉, 생각을 생산하는 사람이 되려면 내 생각을 원하는 수요가 먼저 갖춰져야 한다.


예를 들자면 어떤 영화를 봤을 때, 어떤 책을 읽었을 때,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이 사람이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고 궁금해지는 바로 그 사람이 나는 되고 싶은 것이다.


생각의 수요가 있는 사람이 되려면

첫째로 매력적인 생각을 해낼 수 있어야 하고,

둘째로 생각을 생산해 어딘가를 통해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첫 번째 조건을 달성하는데 신경 쓰느라 두 번째 조건에 관한 건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생각의 탑을 떠올리고 보니 첫 번째 조건과 두 번째 조건을 달성하기 위한 실행 방법론이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 내 머릿속에서 가치 있는 생각을 꺼내 글로 정돈하는 것

2. 그것을 수평으로 수직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 높은 피라미드를 만드는 것

3. 그렇게 키워낸 생각의 높이로 더 높은 사유의 시선을 얻어 내는 것

4. 더 높은 사유의 시선으로 더 가치 있는 생각을 해 내는 것

5. 그리고 앞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

글을 쓰는 행위로, 생각을 생산하는 긴 여정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됐다.


앞으로 글을 많이 쓰겠다고 선언하는 것인가?

글을 쓴다는 것은 마치 예술가들이 자신의 생각을 작품에 담아내듯 생각을 글이라는 틀에 담아내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수많은 지망생들이 평생에 걸쳐 작품들을 만들어내지만 몇 명이나 '진짜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단지 행위를 많이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최선을 다해 좋은 생각을 해내는 것, 그다음에 그것을 잘 담아내는 것이 결국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앞으로 생각을 글에 담아 탑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볼 요량이다.

당장에는 수요가 없을 테니 생산한다기보다는 싸지르는 것에 가깝겠지만, 어쨌든 역량이 닿는 데까지 열심히 쌓아보려 한다.

그리고 가능한 높이 쌓아 올려 언젠가 수요가 있는 생각을 해낼 사유의 시선을 얻어 낼 것이다.


부디 나에게 수요가 있는 생각을 해낼 잠재력이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사상을 남길 수 있는 행운이 있기를.


이어지는 글: 외로움에 관한 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