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은 아이를 살렸지만, 엄마는

제작자의 마음에 남은 방송의 빛과 그림자

by 한 사람의 깊이

방송 제작 일을 하며 늘 마음속에 품던 바람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려운 이들을 돕는 후원 방송 제작을 맡게 되었다.


몇 차례 제작을 이어오던 중 돌도 되지 않은 백혈병 환아 사례를 소개받아 보호자를 만났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늦둥이를 낳은 엄마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사실… 제가 재혼을 했어요. 첫 결혼에서 남매를 낳았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앞이 캄캄했죠. 막막했지만 살아보려고 다시 가정을 꾸렸는데…

설마 아이가 백혈병에 걸릴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는 무거운 삶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촬영은 아이가 골수 이식을 앞둔 시점까지 이어졌다.

방송이 나간 뒤 많은 후원금이 모였고, 그 덕분에 아이는 골수이식을 받을 수 있었다.

수술비와 치료비가 간절했던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제작자로서 보람이 있었다.

방송의 힘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얼마 후, 다른 사례 촬영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복도에서 그녀를 다시 마주쳤다.

아이는 이식을 잘 받고 회복 중이라는데,

그녀의 표정에는 왠지 모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제가… 죄가 많은 엄마예요. 그냥 살아보려고 했을 뿐인데,

전남편 아이들도 제대로 못 돌보고, 재혼해서 얻은 아이까지 이렇게 아프니….

그래도 엄마니까, 이겨내야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 뒤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무게가 숨어 있었다.

방송 출연으로 아이를 살릴 수 있었지만,

방송 이후 정확한 사정을 모른 채 던져진 말들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던 것이다.

“왜 재혼을 했느냐, 왜 또 아이를 낳았느냐”는 말들이 그녀를 움츠러들게 했다.


나는 그 무게를 곁에서 조금이나마 보았기에, 쉽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세상은 얼마나 손쉽게 누군가의 삶을 잘잘못으로 재단하는가.
한 사람의 선택과 사정을 모른 채 던져지는 말들이, 때로는 그 어떤 고난보다 더 잔인하게 다가온다.


그 생각 끝에 문득 떠오른 이야기가 있었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의 공통점은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이라 했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잘 살았다, 못 살았다,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날의 경험은 내게 오래 남았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재단하기보다, 곁에서 무게를 함께 나눌 수는 없을까.
때로는 말 한마디의 공감이, 후원의 금액만큼이나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오늘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 줄을 건네보자.

그것이 그 사람을 살리는 작은 후원이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