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온 남자. 하루종일 남자의 허리를 조이던 벨트를 풀어보지만 그는 여전히 긴장하고 있다. 욕심만큼 가득찬 가방을 제 위치에 두고, 초겨울 추위 탓에 여러 겹 입은 상의, 통이 큰 골덴 바지, 그리고 양말과 속옷을 벗어 빨래 통에 넣는다. 종일 흘린 땀에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해 끈적해진 발은 따듯한 방바닥에 기분 나쁘게 들러붙는다. 화장실로 걸음을 빨리한다.
거울 속 마주한 남자의 표정은 어둡다. 남자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벼운 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던 때로. 도망치는 마음으로 사랑을 좇지 않았던 때로. 순수한 사랑에 가슴이 찢어지던 때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그였지만 무너지는 자신을 보고 또 한 번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설령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무엇하나 바꿀 수 없다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남자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샤워기 앞에 선다. 조금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서럽게 차가운 공기가 들어온다. 발바닥 아래의 수채 구멍도 이에 질세라 찝찝하고 차가운 공기를 내뿜는다. 아주 좁은 화장실 안에 두 가지 차가운 바람이 얽히고설킨다. 화장실은 사람의 온기가 오래 머물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 온수를 튼다. 너무 뜨겁다. 온종일 이어진 영하의 기온에 남자의 피부는 쪼그라들어 군데군데 튿어졌다. 그 균열 사이로 스며드는 40도의 온수는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따뜻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뜨거움이었다. 곧바로 물을 잠궜다.
다시 수전의 각도를 절묘하게 맞춘 후에 물을 튼다. 적당히 따뜻한 온도. 차가운 몸을 적당히 데워주는 온도. 몇 시간이고 계속 맞을 수 있는 온도. 적당히 서운한 온도. 부담 없는 온도가 정수리에서 발목까지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한참을 멍을 때린다. 실제로 머리를 감고 몸에 거품을 내는 시간은 매우 짧다.
적당한 수온에 적당히 뎁혀진 체온을 그대로 가지고 나가면 좋으련만. 남자는 스스로와 한 계약을 이행한다. 수전을 오른쪽으로 끝까지 틀어 물탱크에서 가장 차가운 물을 끌어온다. 몸은 당황한다. "이 새끼 뭐야!" 허벅다리를 집중 공략한다. 큰 근육을 먼저 조져서 마비시키면 그다음은 수월하다. 정강이, 종아리, 엉덩이, 그리고 사타구니까지 단단히 혼쭐을 내준다. 물줄기는 이제 몸의 나머지 반쪽을 향한다. 배, 가슴, 겨드랑이, 마지막으로 등.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물은 가차 없이 체온을 빼앗아 수채구멍 속으로 가져간다. 짧게 소름이 끼친다.
계약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샤워의 마무리는 항상 냉수마찰. 뜨거운 물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찬물이라도 견뎌야 한다. 어느 정도의 속죄다. 차가운 물의 날카로움을 닮은 본인의 죄를 참회하는 과정이다. 일종의 의식이다. 가차 없이 차가운 물줄기가 그에게 찾아올 불행의 대신이길 바라는 기도이다. 감기도 안 걸리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