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한참 동안 잔잔한 우울이 깔려있었다. 그 우울은 마치 호수처럼 물로 가득했다. 그것은 때로는 큰 호수 혹은 더 큰 호수 그러다 어쩌다 작은 호수로 변하고는 했다. 그러나 한번 생긴 호수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때에 따라 크기를 변화하던 호수는 나를 점점 그 안으로 조금씩 조금씩 끌고 들어갔다. 그 덕에 나의 눈물은 점점 많아졌고 어느새 사는 것이 귀찮고 지루해졌다.
그때의 나는 내가 사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얼마나 더 이렇게 지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그 호수를 없앨 수 없을까 생각하지도 못했다.
한번 마음에 심어진 우울은 쉽게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무감각, 무관심, 피로감, 지친 모습... 삶의 의지가 조금씩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어린아이를 두고 먼 길을 떠날 수는 없었다. 엄마로서 아니 그보다 나로서 그것들을 이겨내야만 했다.
가장 빠른 방법은 병원을 가는 것이었다. 가서 약을 먹고 치료받으면 마치 감기가 낫는 것처럼 낫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일주일, 이 주일이면 나을 감기가 아니라 몇 달이,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병원을 갈 수도 있지만 그전에 조금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병원대신 출근이었다.
출근을 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 마음속에 우울이 짙어졌던 것뿐이지 심각한 우울증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마음속 커다랗던 호수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출근 후 일 년 만에 아주 작은 흔적만 남긴 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새 그 흔적까지 사라지길 기대하고 있다.
어떻게 출근을 한다고 우울한 것이 사라져...?
그러나 내겐 그것이 통했다.
분명 출근하는 하루하루가 신나고 재밌지는 않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일이 생겨도, 그 어떠한 상황이라도 출근만 하면 나의 모든 다른 스위치는 꺼진 채 '일하는 모드' 스위치로 바뀌어 있었다.
재밌게도 '일하는 모드 스위치'는 한번 켜지면 다른 사소한 스위치를 모두 꺼버리고 그 후에도 더 이상 스위치를 굳이 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평소에 온갖 스위치가 다 올라가 힘들고 괴로운 나로서는 되려 좋았다.
출근 후의 나는 우울을 조금씩 잊고 살게 되었다. 되려 조금의 밝음도 건강도 체력도 되찾았다.
이제 나는 나로서 사는 방법을 알았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찾았고, 그보다 더 즐겁고 행복하게 지낼 방법을 찾았다. 심지어 내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구체적으로 정리해 나가기도 시작했다.
출근을 통해 비로소 나는 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