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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버렸다

2탄

by Blair

처음부터 몰래 버리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 년 전부터 시댁에는 물건이 조금씩 많아지며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시댁에 머무는 것이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도 시댁에는 물건이 많긴 했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 어머님이 인지능력장애가 생긴 후로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특히 좋아하는 물건이나 옷을 사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질수록, 산 것을 잊고 같은 물건을 사는 일이 반복될수록 집안에 물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게다가 언제 아이가 올지 모르니 아이에게 준다며 귀엽고 예쁜 물건을 사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그 물건들은 정말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그러나 정작 그중에 아이가 좋아하는 것은 겨우 한두 개 일뿐이니 갖기 않고 버려야 하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어머니는 원래 깔끔하신 분이었다. 지난 수년동안 갑자기 혹은 예정된 날짜에 시댁을 드나들며 들었던 생각은 '부모님 댁은 늘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다' 이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최근 일이 년 정도 시댁에 들어설 때마다 다른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물건이 많지?' '거실에 발 디딜 공간이 없네!' '옷방에는 옷이 이렇게 많을 일이야?' 집안에 물건이 많아질수록 더 이상 시댁 가는 것이 즐겁지 않고 불편해졌다...



물건이 너무 많기도 했고, 자꾸 그것들을 가져와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우리 가족은 "저희 것은 안 사주셔도 돼요~" "아이 물건은 같이 가서 사주세요" 등등 수도 없이 말해보았지만 "다신 안 산다, 사지 않겠다"는 말뿐이었다. 다음에 가보면 더 많은 물건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말로 숨 막혔다. 어느덧 시댁에 가는 것이 망설여질 정도였다.



남들은 아이 물건 사주는 것이 좋지 않냐~ 심지어 아들 며느리 옷을 사다 주니 좋지 않냐 하지만... 취향이 다르기도 하고 필요 없는 물건을 자꾸만 사다주시니 아깝기만 했다.



게다가 아무도 원치 않는 물건으로 집이 가득 차니 보고만 있어도 괴로웠다. 그래서 고민 끝에 물건을 버리기로 했다.







원래 시댁 정리의 처음은 어머님과 함께할 예정이었다. 지난 추석 연휴는 워낙에 길었으니 아이가 아빠와 외출을 하면 그동안 나와 어머님이 옷방을 정리하면 될 것이었다(물론 다른 곳도 정리가 시급했지만 일단 진짜 많은 옷부터 정리해야 했다.)



그러나 옷 정리 전에 먼저 부엌을 치우며 쓰레기 봉지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순간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내 살림은 내가 치울 테니 내버려 두어라!"



그다음으로 옷방에 들어가 옷을 치우려고

"어머님 저랑 같이 옷 정리해요~" 말씀드리자 "내가 그동안 모은 소중한 옷이다. 너네 돌아가면 내가 하나씩 보며 정리하겠다"라고 강경히 말씀하셨다.



물론 처음엔 정리하신다는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분명 지난번에도 지지난번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대로인 모습을 보며 이것은 말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장성한 자식들이 부모님의 살림을 돌봐줄 때가 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몰래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버리고 또 버리자







가장 먼저 부엌에 오래 보관되어 있는 음식과 식기류를 버렸다. 오래된 조미료, 지저분한 식기류 그리고 재활용품 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것들을 모두 쓰레기 봉지에 넣기 시작했다. 수년 전 친정에서 가져다 드렸던 꿀(삼촌이 직접 양봉한) 이 병째로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버리기 정말 아까웠다.



식탁에도 이미 오픈된 과자봉지, 오래된 스낵들... 그리고 빈병, 보관된 그릇들을 조금씩 버리기 시작했다. 모아놓은 것들이 많아 재활용품들이 많이 나왔고 그리고 그만큼 쓰레기도 많이 나왔다.



지난여름에는 냉장고를 정리했는데 이번에는 냉장고까지 손댈 수 없었다. 아무래도 다음번에 왔을 때 더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가장 문제인 곳은 옷방이다. 옷들이 이제 거실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옷방을 가득 채우고 넘어서 옷방 앞으로도 옷이 가득하고, 심지어 어머니 방까지 옷이 넘쳐났다. 마음 같아선 확인하지 않고 손으로 들어 올려 한꺼번에 버리고 싶었지만 분명 입으시는 옷도 있으실 테니 하나씩 확인하고 버려야 했다.



옷을 버리는 기준은 일단 낡은 것, 사이즈 작은 것(사이즈가 작은 옷은 입지 않으신다) 우선순위로 버리기로 했다.



옷방에 들어다니 정말 어마어마한 옷더미였다. 눈에 보이는 옷을 하나씩 살펴가며 커다란 봉지에 하나씩 골라 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 심혈을 기울여 구별했지만 옷이 워낙 많아 나중에는 더 빠른 속도로 해치웠다. 마치 옷방은 하나의 옷 매장과도 같았다.



그 옷 더미 속에 수년 전 내가 백화점에서 사드린 값비싼 잠옷이 나왔다. 그때는 어머님이 잠옷을 입지 않으시는지 몰랐다. 그건 아까워서 따로 가지고 왔다.



그나마 낡아 보이는 옷, 오래된 보이는 유행 지난 옷은 버리기가 쉬웠다. 게다가 새것 같은 옷인데 입지 않을 것 같은 아까운 옷들도 많았다. 워낙 화려한 패턴을 좋아하시는 분이라 옷이 패턴이 많았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전국? 전 세계 패턴(무늬) 옷은 다 우리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이번에는 조용히 커다란 봉지 하나만큼 분량만 버렸다. 몰래 버리는 옷이라 가지고 나가서 버리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조금씩 정리한 덕분에... 마지막에는 이제 다시 옷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올 정도로 공간이 생겼다.



이번 정리는 여기까지다. 글로는 두 편밖에 안되지만 조금씩 몰래 하느라 며칠 동안이 걸렸다.







며칠 전 잠시 시댁에 갈 일이 있었다. 한 달 만에 들린 것인데 옷방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역시 아이 물건은 몇 가지 더 늘어난 것 같고 남편 옷이 한두 개 정도 더 늘어있었다. 어머님은 남편에게 입어보라고 하고 남편은 안 입겠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다음에 와서 옷 정리를 더 해야지 그리고 그때는 냉장고 정리도 해야지(+찬장)까지 하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일단 몰래 버리기 1회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다음번 시댁 방문에 2회를 실행할 예정이다. 시댁에 물건이 적어지는 날까지 몰래 버리기는 계속될 것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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