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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잘 안 되는 날에는

by 퇴근후작가

나는 그림 그리는 시간을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림이 잘 그려지는 건 아니다.


어떤 날은 그림이 너무 싫어
작업실 바닥에 누워만 있고 싶고,

집중이 안 돼 청소만 하다 하루를 허비한 적도 있다.

작가들의 고질병이라는 '내 그림 구려병'도 가끔 증상이 나타나

자괴감에 빠지는 날도 잦다.


하지만 나는 초대전을 앞두고 있는 작가다.


그래서 그림이 안 되는 날에도,

심지어 그리고 싶지 않은 날에도

그냥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렇게 그냥 그림을 그린다.


정말이지,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꾹 누르고

하기 싫은 마음을 달래며 캔버스의 빈 공간을 조금씩 채워나간다.


그렇게 묵묵히, 한두 시간.
길게는 하루, 이틀. 그러다 보면

어느새 진도가 제법 나간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나는 다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신나게 붓질을 할 수 있는 나로 돌아와 있다.

그땐 또 내 그림이 제법 괜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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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작업실 풍경

그림을 그린다는 건 꽤나 외로운 일이라는걸 요즘 자주 느낀다.

누가 그림 그리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니 누굴 붙잡고 하소연할 수도 없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유화 그림 재료들의 특색도 각각이라 변수도 많고

내가 고른 색이 맞는 선택인지 확신이 없어
색을 결정해 칠하기까지 며칠, 길게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완성된 그림은 또 다른 나다.


주제는 다 다르지만 결국엔 ‘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딘가 한켠에 '나의 모습'이 보인다.


요즘은 가끔 헷갈린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건지,
그림이 나를 그리는 건지.
아니면 그림이 나를 만들어가고 있는 건지.


그래도 다행인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작업실에서 틈틈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오늘도, 너무 놀고 싶지만...

퇴근 후 나는 다시 작업실로 향할 예정이다.

그리고 들썩이는 엉덩이를 꽉 눌러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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