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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딸처럼, 다정하게

by 퇴근후작가

나에게 가장 어려운 건 나와 잘 지내는 것이다.

그런 내가 불안한 나와 관계 맺는 연습을, 나는 이제 막 시작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배려가 많은 사람이다.

그것은 어쩌면 ‘습관’이자 ‘본능’ 같은 것이었다.


늘 촉수가 온몸에 서 있는 듯, 보이지 않는 파동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남들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불편함을 나는 먼저 눈치챈다.

식탁에 놓인 의자의 방향, 누군가의 표정 속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불편함...

그런 것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늘 마음에 담는다.

그래서 나는 먼저 움직이고, 먼저 챙기고, 먼저 배려한다.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참 세심하고 늘 배려가 넘친다고...”


그 말이 칭찬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 ‘배려’가 나를 가장 지치게 하는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컨디션이 좋을 때라면 괜찮았다.

여유가 있을 땐 기꺼이, 즐겁게 남을 돌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이 무겁거나 마음이 이미 지쳐 있을 때조차, 나는 습관처럼 다른 사람들을 챙겼다.

그러면 어김없이 균형이 깨졌다. 내 안의 여백이 모두 소진된 자리에는 공허함과 피로만 남았다.


고마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내가 내어준 마음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

심지어 한 번이라도 소홀해지면 서운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 순간 나는 무너져버린다.


“왜 나는 늘 이렇게밖에 못할까.”

자책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불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스며들었다.


나를 가장 먼저 돌봐야 했던 나는, 언제나 후순위였다.


그런 내가 변화를 마주한 건 아주 우연한 순간이었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흘러나온 라디오 방송이었다.


“스스로를 챙길 때, 나를 딸이라고 생각하세요.

딸을 대하듯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잘 입히고,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순간, 이유도 모른 채 울컥했다.


그 말이 나의 빈 곳을 정확히 건드린 것이다.


나는 나를 한 번도 그렇게 대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세차게 후려쳤다.


언제나 참아내는 법만 배웠지, 나를 돌보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내 안의 작은 목소리를 무시한 채, 늘 “괜찮아”라는 말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하지만 정말 괜찮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순간, 오래 묵은 미안함이 몰려왔다.


나는 나를 너무 오래 방치해 두었다.

내가 나를 가장 잘 돌봤어야 했는데, 나는 늘 나를 마지막 자리에 두고 있었다.

내가 내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엘리스달튼브라운의 그림.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후로 아주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무리라고 느껴질 때는 속도를 늦추는 연습을 했다.

습관처럼 내뱉던 “난 괜찮아”라는 말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정말 괜찮은 걸까? 아니면 또 내 의지를 억지로 누르고 있는 건 아닐까?”

스스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나를 늘 최우선에 두지는 못한다.

오랜 습관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안다. 나를 지켜야만 다른 사람도 진심으로 지킬 수 있다는 걸.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나의 딸을 대하듯 나를 챙기려 애쓴다.


밥을 제때 먹였는지, 잠은 충분히 잤는지, 혹시 혼자 무언가를 참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이 연습만으로도 불안은 조금 가벼워졌다.

나를 후순위로 두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불안은 여전히 내 곁에 있지만,

이제는 나를 무너뜨리는 적이 아니라,

나와 함께 걸어가는 그림자가 되었다.


나와 가장 잘 지내는 연습.

그것은 곧, 내가 나를 지키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깨닫는다.

불안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은, 결국 나를 가장 먼저 사랑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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