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준비. 내가 떠나온 거리

by 피카타임

난 종종 거리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가족들을 두고 일본에 간 적이 있다. 절정의 고도에 날아오른 비행기는 시속 800km가 넘는 빠르기로 나를 가족들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있었다.

지구에 못 갈 곳이 없고, 그중 일본은 하루에 몇 번이고 왕복할 수도 있을 만큼 가까운 나라지만 1000km라는 거리를 생각하는 순간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2시간 남짓. 아무리 더 빨리 돌아오고 싶어도 내게 2시간이란 시간이 없다면 돌아올 수 없는 거리를 두고 사랑하는 이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 감정은 꼭 타국이라서만 드는 건 아니었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는 KTX는 3시간 정도면 목적지에 나를 데려다주지만 기차 안에서 스치고 바뀌는 많은 풍경은 실로 그 거리가 가깝지 않다는 걸 계속 보여주었다.

지구 종말을 코앞에 둔 어느 날 내게 허락된 시간이 3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면 부산과 서울을 두고는 사랑하는 이와 만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산골마을 같은 군, '서면'에서 '동면'으로 시집 온 우리 할머니는 평생 친정에 가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km 떨어진 친정에 가는 데 필요한 시간은 꼬박 걸어 하루 남짓. 그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평생 친정 가족들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니, 이런 슬픈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할머니의 친정'이란 단어는 낯설다. 할머니들은 처음부터 우리 가족 속에 태어나 한 번도 우리 가족이 아닌 적이 없다가 오롯한 우리 가족으로 죽는 존재였다.

그런 할머니의 마음속에 그리운 존재가 있었을까 봐, 그 존재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의지에서가 아니라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거리'에 의한 체념과 순응이었을까 봐 상상조차 겁이 났다.

그저 엄마와 아빠를 키우는 일이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일이 할머니의 완벽한 소명이었고 기쁨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외에 할머니가 느끼는 감정은 마치 모든 게 불순한 것처럼.


할머니의 친정에 대해 생각하게 된 어느 날, 멀어서 갈 수 없었던 그 거리가 고작 차로 삼십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생각이 떠오른 어느 날, 그 후로 수없이 상상 속에서 할머니를 내 차에 태운다. 그리고 할머니의 친정으로 가고 또 간다.


어디 동면과 서면뿐일까. 할머니가 친정을 그리워하던 시절은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때였다. 난 죽어도 살 수 없는 시대였다.

일본, 중국, 러시아, 더 멀리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필리핀, 괌까지. 지금도 며칠의 시간이 생기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그곳에서 그들이 당했을 고역과 느꼈을 거리감을 생각하면 난 독방에 갇힌 것처럼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그렇게 가족을 다 두고 오른 비행기 안에서 처음 '거리'가 주는 공포를 느끼고는 여행을 떠나는 일에는 순수한 설렘 외에 또 다른 어떤 무거운 감정이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일종의 숙연함이랄까, 겸허함이랄까… 내가 떠나고 난 후의 내 일상을 여행을 떠나기 전 미리 돌보는 시간과 행위를 갖게 되었다.


우선 구석구석 청소를 한다. 평소에 미련이 가득해 버리지 못했던 물건이나 끄적임이 가득한 종이들을 과감히 버린다.

냉장고 속에 오래된 음식들도 처리한다. 늘 보관만 하던 옷들도 버린다.

은행 간 이체나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곤란을 겪게 될 일들도 미리 해둔다.

일종의 여행 의식이었다. 종종 사람은 떠난 후에 남은 것들로 평가된다. 어떤 종류의 떠남이든 나의 부재 후 남은 것들이 가볍고 정갈하길 바란다.

남은 것들로 인해서 오해를 받거나 미련을 들켜 버리는 건 싫었다.


그리고 부모님.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그분들의 필요를 채워준다. 그리고 소설 속 피에타상 앞에 엄마를 부탁하는 주인공처럼 나의 부재중 부모님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으로 모든 준비가 끝이 난다.


이 모든 과정은 그 '거리'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사랑하는 당신들과 내가 떨어져 있어야 할 거리. 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범위의 그 모든 거리.


가장 바쁠 때 우도행 여행이 끼어 있었다. 그것이 보홀이 아닌 우도가 더 좋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따로 준비할 게 없는 여행이었다. 일상의 정리만으로 충분한 준비가 되었고, 여행에 '일'처럼 느껴지는 요소는 그 무엇도 없었기에 부담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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