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잃어버린 질문 : 선의
스물넷, 첫 발령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신규 교사인 내게 주어진 업무는 학생자치 담당이었다. 아마도 학교에서 가장 젊은 교사라서, 열세 살 전교 회장과 열두 살 전교 부회장을 잘 보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덥석 그 일을 맡겨주셨다. 이 주일에 한 번 전교 회의를 열고, 전교 임원의 공약 실천을 도와주고, 캠페인이나 봉사활동을 데리고 나가고. 소소하게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젊음의 체력과 패기로 밀고 나갔다.
그런데 유난히 힘겨운 시기가 있었다. 바로 12월이었다. 이미 중학생이 된 듯 굴던 6학년 우리 반 아이들은 사사건건 사고를 쳤고, 학기 말이라 처리해야 할 행정업무도 쏟아졌다. 일 년 내내 달려온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마치 결승점을 앞둔 마라톤 주자처럼 헉헉대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아직 학생자치회 업무의 마지막 과제가 남아 있었으니, 다름 아닌 전교 임원 선출이었다. 임원 선출 과정은 무엇보다 공정하고 투명해야 했다. 혹여 놓친 일이 있어 민원이 들어올까 전전긍긍하며 나는 도장 깨기를 하듯이 한 단계씩 밟아 나갔다. (요령을 부리는 법을 아직 몰랐다) 후보자 아이들을 불러 선거 벽보를 만들게 하고, 소견 발표문도 한 번씩 검토해 주고, 투표용지도 색깔별로 출력해 일일이 자르고, 먼지 구덩이에 잠들어 있던 기표소도 꺼내 설치했다. ‘어디 유명한 도사님께서 분신술 좀 안 가르쳐 주시나..’ 싶을 정도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하루하루였다.
선거 당일, 모든 일정이 끝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아침부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뛰어다니며 안달복달했는데 다행히 선거인 수와 투표수가 맞지 않는다든지, 동점이 나온다든지 하는 이슈는 없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일은 투표소 정리였다! 터덜터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텅 빈 강당으로 내려가보니 사각형 기표소가 여러 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네 개의 다리를 힘으로 분리해 접고, 가방에 넣어 보관하는 구조였는데 그 과정이 여건 버거운 게 아니었다. ‘아, 너무 힘들다. 집에 언제 가나..’ 중얼거리며 낑낑대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 아무도 없는 텅 빈 강당에 슬리퍼 끄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이어 낮고 느린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선생님, 거의 다했어요? 일찍 올걸”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떤’ 남자 부장님이셨다. ‘어떤’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이유는, 그분이 정확히 무슨 업무를 맡고 계신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아마 3학년인가 4학년 부장님이셨을 거다. 평소 교류가 거의 없던 분인데 갑자기 강당에 출몰하신 것이다. ‘여기 왜 오셨지? 이따가 여기서 운동이라도 하시려나’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그가 기표소를 통째로 들어 올리더니 척 척 능숙한 손놀림으로 정리를 시작했다.
“부장님, 이따 운동하세요?”
“응?”
“얼른 여기 제가 치울게요”
나는 부장님의 손에서 기표소를 받아 들려고 힘을 줬다. 그런데 부장님은 의외의 말씀을 툭 하니 던지셨다.
“이거, 도와주러 온 건데?”
그때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감동도, 감사함도 아니었다. 굳이 수치화해 보자면 30%의 당황과 70%의 놀라움이었다. 평소 말 한 번 제대로 나눈 적 없는 분이, 신규 힘들까 봐 일부러 강당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는 나를 보며 부장님이 태연하게 말씀하셨다.
“원래 자치회가 힘들어. 같이 하면 빨라~”
그 한 마디에 쓰나미 같은 감동이 밀려왔다. 세상이 이렇게 따뜻하다니! 그때 나는 호기롭게 다짐했다. 나도, 저런 선배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경력이 쌓이고 시야가 넓어지면 꼭 힘들어하는 어린 선생님들을 기꺼이 도와주어야겠다고, 그렇게 베푸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렇게 7년이 흘렀다. 학교 돌아가는 것도 대강 알겠고, 업무도 익숙해졌고, 요령도 생겼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7년 차 옆 반 교사가 되었다. 수업과 업무가 끝나면 지친 몸을 늘어뜨리고 교실에 불 끄고 가만히 앉아 있는, 그런 사람이. 누군가를 직접 찾아가 도와준 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정말 솔직히 말하면, 도움을 요청하는 메신저가 와도 모른 척 넘긴 적이 있다. 흠흠.
피곤해서, 일이 많아서, 나 말고도 할 사람 많을 테니까..라는 말은 핑계였다. 사실 진짜 속 마음은 이랬다. ‘다른 사람의 일을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내가 도와준다고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본인의 일은 본인이 책임지고 해야지!’ 공감 능력은커녕 조금의 호의도 온데간데없었다.
각자도생이 트렌드인 시대 아닌가. 가뭄에 콩 나듯 뉴스에 등장하는 누군가의 목적 없는 선행을 마주할 때마다 경외심보다 이질감이 앞서는 시대, 다른 사람보다 편하게 잘 사는 것이 인생의 우선순위가 되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면서 세상에 수 천만 명의 '나'만 남은지 오래 아닌가. '나'만 잘 살면 되고, '나'만 괴롭지 않으면 된다. 세상이 원칙과 정의 없이 흘러가도 나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면 상관없다. 다른 사람들이 굶든, 억울한 일을 당하든 다 개인의 책임이니 동요하지 않는 게 현명한 일 아닌가.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7년 차 교사인 나 역시 그런 생각 속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의 세계에서 한 가지 질문이 들려왔다. 그 질문에서 문득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수한 선의를 발견했다. 사람 사이에 본능처럼 흐르는 '연대' 말이다.
요즘 아이들은 희망자에 한해 우유 급식을 먹는다. 음식을 억지로 먹이는 추세도 아니거니와, 알레르기나 소화 문제를 고려해 희망에 따라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우유 한 팩을 원샷하는 아이도 있지만, 한 번에 마시기 힘든 아이들은 종종 우유 입구를 열어놓은 채 책상 모서리에 두고 수시로 홀짝인다. 문제는 아이들이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절대 가만있지 않다는 것이다. 뾰족한 팔꿈치, 혹은 지나가는 짝꿍의 몸짓 하나에 우유는 어김없이 바닥으로 쏟아진다. 교실에서 우유가 쏟아지는 건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거듭된 주의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면 한숨부터 나오기 마련이다. 수업 흐름은 끊기고, 꿉꿉한 냄새는 오래 남는다. 더군다나 아이들은 바닥에 흘린 액체를 요령껏 닦지 못한다.(애꿎은 휴지만 잔뜩 쓴다)
5학년 국어 시간, 어김없이 그날도 반쯤 출렁이던 우유가 바닥으로 직행했다. 안 마실 거면 입구를 잘 닫아놓거나 책상 안쪽으로 안전하게 놓으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건만 소용없었다. 나도 사람인지라 화가 치밀었다. 그런데 잔소리를 시작하려는 순간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멀리 있는 분단의 아이까지, 말없이 사물함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우야, 옷에 안 묻었어? 일단 이걸로 닦아"
"이 정도면 얼마 안 쏟아졌네, 금방 닦을 수 있겠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두루마리 휴지를 한껏 손에 뭉쳐 뜯더니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 척척 움직였다. 평소에 자기 자리조차 제대로 청소하지 않고, 우유 냄새만 나도 코를 부여잡으며 토할 것 같다며 엄살을 피우던 아이들인데, 이게 웬걸.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선생님, 저도 도와주고 싶은데, 물걸레 빨아와도 될까요?"
어떤 아이는 물걸레를 빨아와 바닥을 박박 문지르기 시작했고, 또 어떤 아이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상황이 깨끗이 정리되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할 일을 마친 뒤 제 자리에 돌아가 앉는 아이들을 보며 듣기 싫은 말부터 내뱉으려던 나의 성급함이 부끄러워졌다. 맞다. 의도가 없는 실수였고, 불편함을 끼쳤을지언정 큰일은 아니었고, 누군가 함께 도와주면 금방 해결될 일이었다. 한숨 고르면 아무 문제가 없을 일을, 내가 그르칠 뻔했던 것이다.
"먼저 나서서 친구의 일을 내 일처럼 도와주는 모습이 정말 멋지다. 지우야, 지우도 나중에 다른 친구가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도와줄 수 있겠다. 그렇지?"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말은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기도 했다. 7년 전, 자기 일도 아닌 데 기표소를 척척 정리하시던 부장님이 떠올랐다. 나와 상관없는, 다른 이의 우유를 기꺼이 닦아주는 그 마음이 참 귀했다.
최근, 사람들이 서로에게 더 매정하고 박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자신이 한 일에는 관대하면서(잘못을 실수로 치부하기도 한다) 타인의 잘못에는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하다.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이익을 보면, 마치 자신이 손해를 보는 듯 질겁하고 경계한다. 수천만 명이 매일 새로 시작되는 100미터 달리기 경주에서 동시에 출발하는 것처럼 산다.
경제발전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사그라든 이후, 단기간에 일구어낸 고효율 경제발전의 불순물만 남아 무한경쟁과 비교, 갈등의 세상으로 사람들이 내몰려져 여유가 없는 탓일 테다. 누군가와 끊임없이 비교하며 행복을 느끼도록 강요된 세상 속에서 따뜻한 선의를 바라는 것이 환상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나만 아니면 되지'의 마음이 전염되는 모습은 여전히 안타깝다.
다른 이를 돌아볼 여유도 없고, 굳이 마음 쓸 필요성을 못 느끼는 상황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선생님, 저도 도와주고 싶은데 물걸레 빨아와도 될까요?"라는 아이들의 마음을 목격하게 되면 이 세상을 쉽게 외면할 수가 없어진다.
한 명의 개인은 생각보다 나약하고, 우리는 서로를 보완하며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현대 사회에 이르러 사회 제도와 기술의 발전이 개인의 삶을 독립적으로 지탱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세상에는 개인의 역량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존재한다. 역사를 봐도 그렇다. 지금 당장이라도 예기치 못한 변화나 사건으로 인생이 곤두박질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간과한다. 평소 공동체의 문제나 타인의 어려움이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며 무관심하게 살던 사람이, 평생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 수 있을까. 그때도 각자도생을 말할 수 있을까. '함께'의 정신을 잃어버린 세상에서는 차가운 무관심만 존재한다. 무관심의 시선은 쉽게 장착되고, 쉽게 익숙해진다.
살아갈수록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음을 절실히 느낀다. 하루에도 수없이 마주치는 이들, 무 썰 듯 딱 잘라 경계하기 전에 저들도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회사 동료, 출근길 만원 버스의 옆 사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 편의점에서 물건을 계산해 주는 직원, 일 처리를 도와주는 공무원, 동네 병원의 의사 선생님까지 그들도 지구의 작디작은 점으로 함께 살아가는 동행자일 뿐이며, 혹시 모를 나의 구원자이자 내가 그들의 구원자가 될 수도 있다!
선의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의 따뜻한 시선과 호의, 선행이 돌고 돌아 내게 돌아오고, 나의 마음이 또 누군가에게 돌고 돌아가 닿는다고 믿는다. 짐도 나누면 가벼워진다. 다른 이의 어려움을 애써 모른 척하지 않고, 적어도 공감의 시선을 보낼 수 있는 연습을 진짜 시작해보려 한다. 내가 건넨 작은 선의가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