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잃어버린 질문 : 배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교실은 온 동네의 드센 열네 살이 뒤섞여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무법지대였다. 일종의 서열 싸움이었는데, 더 강한 집단에 들기 위해 친구의 약점을 잡아 이용하는 악랄한 학생들도 있었다. 이미 파여 있던 작은 구덩이에 포클레인을 들이밀듯, 서로의 마음을 파헤쳐 헤집어 놓았다. 그 혼란의 한가운데서, 담임 선생님은 그래도 이 사춘기 녀석들을 교화시켜 보겠다고 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동물 이야기였는데,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건 바로 돌고래 이야기였다. 돌고래는 포유동물이라 아가미가 아닌 폐로 호흡한다. 그래서 아무리 오래 잠수하더라도 주기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어야만 살 수 있다. 대서양에서 실제로 관찰된 일이라 했다. 한 무리 속에 병든 돌고래가 있었는데, 그 녀석이 스스로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자 동료 돌고래들이 무려 두 시간 동안 밑에서 밀어 올려 숨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엄청난 에너지 소모하고, 천적의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도 말이다. 결국 그 돌고래는 죽었지만, '동료가 곤경에 처했을 때 외면하지 말고 함께 품고 나아가자'는 의도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물론, 그 뜻을 진심으로 새긴 학생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이 이야기가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은 이유는, 동료 돌고래의 이타적인 행동에 감응해서가 아니었다. 생존이 걸린 세계에서 돌고래의 행동이 미련하고 한심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앞 길이 구만리인 데다가 잘못하면 천적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 무리에는 분명, 그런 '미련한' 행동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 돌고래도 있었을 거라고. 어쩌면 그게 더 평균적인 모습일 거라고.
자신의 이익보다 동료를 먼저 헤아리는 일은 나에게 너무나 낯설고, 시대착오적이며, 뜬 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그저 도덕교과서 같은 이상적인 교훈으로만 들렸다. 세월이 흘러 내가 교사가 되었고, 교사라면(더욱이 초등교사라면) 새싹 같은 아이들에게 늘 양질의 물과 햇빛만 내리쬐어 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설령 내 본심과 다를지라도, 소위 말하는 '좋은 말'을 골라해야 했다. 가끔 교실에서 불협화음이 들릴 때, 돌고래 이야기를 해주곤 했지만 딱히 아이들이 바뀔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초여름의 국어시간, 여행지 소개문을 만들기 위해 두 명씩 짝을 정하던 중이었다.
"선생님, 제가 준우랑 같은 모둠해도 될까요?"
우리 반 아픈 손가락이었던 준우의 시선을 모두가 외면하는 가운데, 선뜻 같이 하겠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우야, 나랑 해도 괜찮지?"
흔들리는 준우의 눈동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오히려 되묻던 한성이의 말에서 나는 십수 년 만에, 상상 속의 돌고래를, 눈앞에서 목격하고 말았다.
교실에는 또래에 비해 '느린' 아이들이 있다. 내가 만나온 아이들은 크게 세 부류였다.
첫 번째는 행동이 단순히 느린 아이들이다. 생각이 너무 많거나 혹은 없어서 말이나 행동이 두 배쯤 굼뜨게 나타나는 아이들이다. 사실 동작만 느릴 뿐 학습이나 친구관계에 큰 지장은 없고, 시간이 지나며 대부분 나아진다.
두 번째는 일과 중에 특수반에 다녀오는 아이들이다. 공식적으로 특수교육대상자인 이 아이들은 원 교실에서 생활할 때 조금 느리거나 실수를 해도 친구들의 배려와 도움을 많이 받는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앞의 두 부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이들이다. 교사로서 가장 고민이 많이 되는 경우다.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하고 인간관계도 서툴러서 친구들에게 은근한 기피와 무시를 받는다. 안타까운 점은 이 아이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가 크지 않고, 제 나름대로 눈치를 발휘해 학교생활도 곧잘 따라가기에 친구들의 도움이나 배려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애매한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는 아이들. 여집합도 교집합도 아닌 존재들. 준우가 그중 한 명이였다.
준우는 특히 스스로 생각하고 글로 표현하는 걸 어려워했다. 예를 들면, '오늘 기분이 어때?'라는 질문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답할 수 있었지만(그마저도 '좋아요', '괜찮아요'처럼 단순했다), 그걸 글로 쓰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준우의 최선이 친구들의 성에 차지 않았기에 친구들은 은근히 준우와 같은 모둠이 되는 걸 피했다. 그런데, 한성이가 모두가 꺼려하던 준우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다! 준우는 구원투수라도 만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성이 옆에 찰싹 붙었다.
여행지 소개문 만들기는 국어 수행평가였다. 아이들은 팀별로 가고 싶은 여행지를 정한 뒤 태블릿을 이용해 자료를 찾았다. 주제가 흥미로웠는지 모두가 조그만 머리를 맞대고 열심이었다. 삼십 분쯤 지난 뒤 교실을 둘러보는데, 한성이와 준우네가 새끼손가락의 거스러미처럼 자꾸 신경이 쓰였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준우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한성이를 가만히, 마치 '멍 때리기 대회'의 참가자처럼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 하기 어려워할 것이 뻔했다. 준우를 다그쳤다.
"준우야, 네가 맡은 일 있지?"
준우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오늘은 두 명이 같이 하는 거니까, 준우도 반은 만들어야 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준우가 아닌 한성이의 목소리였다.
"아, 선생님! 준우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찾았어요. 많이 했어요. 그리고 제가 이거 하라고 얘기했어요."
한성이의 말투는 준우가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했다. 하지만 말만 그렇지 분명 한성이가 전부 도맡고 있을게 분명했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준우가 아무것도 안 해요'라며 일러바쳤을 텐데, 한성이는 준우가 혹시라도 혼날까 봐 감싸고 있었다. 준우의 어려움을 이해한 것이다. 한성이는 자신의 어깨 뒤에 준우를 꽁꽁 숨겼다.
발표 시간, 두 아이는 영국의 여행지를 소개했다. 이때의 규칙은 간단했다. 두 사람이 반드시 함께 발표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 내용을 반반으로 나누든, 9대 1의 비율로 나누든 상관없지만, 모두가 한 마디씩은 하자는 약속이었다. 대부분의 팀에서는 발표를 좀 더 잘한다고 생각되는 친구에게 내용을 몰아주었다. 그런데 한성이와 준우는 아니었다. 의외로, 딱 반반으로 나누어왔다.
"저희는 영국의 여행지에 대해 발표하겠습니다"
한성이의 낭랑한 목소리가 교실 안을 채웠다. 다음은 준우의 차례였다. 준우는 5학년임에도 한글을 더듬더듬 읽었다. 목소리도 워낙 작고 얇은 편이라 발표를 듣는 모든 아이들이 한껏 집중해야 했다.
"이곳은 빅... 빅.."
역시나 난관이었다. 방과 후에 남아서 공부해도 글 읽기가 어려운 준우였다.
".. 이곳은 빅 벤입니다"
그때 한성이의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입을 살짝 가리고, 준우가 따라 읽을 수 있도록 먼저 읽어주고 있었다. 대신 말하지도, 답답해하지도 않고. 준우가 자기 힘으로 끝까지 읽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곳은 빅.. 벤입니다"
한성이의 말을 따라 준우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번졌다. 다음 장도, 그다음 장도 한성이는 낮게 속삭이며 인내심을 갖고 준우의 발표를 도왔다. 결국 두 아이는 정확히 반씩 나눠 공평하게 발표를 마쳤다. 수업이 끝나고 두 아이를 불러 말했다.
"한성이, 수고했어. 준우도"
"준우도 자료 잘 찾았어요. 같이 하니까 재밌었어요!"
한성이가 준우와 팀을 한 건 누가 시켜서도, 칭찬받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반 친구로서 한 가지 일을 함께 해낸 것뿐이었다. 나와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편견을 조용히 무너뜨리며, 준우의 어려움을 자신의 허점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저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서 그를 존중하고 품었다.
그 모습이 대서양 바닷속, 끝까지 아픈 돌고래 주위를 맴돌던 돌고래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동료가 어떤 모습이든 끝까지 함께 가려했던 그 돌고래처럼. 비록 조금 느릴지라도, 조금 성에 차지 않을지라도.
불편함과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는 세상이다. 어떤 불가피한 이유도, 다른 이의 부득이한 사정도 '나'에게 결코 불편함과 답답함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공기처럼 만연하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몸이 불편한 어른이 내 앞에 서있을 때,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이 천천히 내릴 때, 별로 바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직장에서 동료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굳이 내가 왜'라는 벽을 세우고 모르는 척을 했다.
왜 그랬을까. 편안함을 포기하고 남을 도와주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져서였을까, 배려하는 나의 모습이 가식처럼 느껴져서였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미련하다'라고 손가락질받을까 두려워서였을까. 동료 돌고래의 행동이 '미련'하게 보였던 것처럼 나 또한 주변 사람을 동료나 친구가 아닌, 꺾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가 꺾인다고 해서 내가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이 쉽게 꺾여버린 이유들을 알기에, 이제는 함부로 '배려하라'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누군가의 어려움까지 품어줄 여력이 없다는 것도, 또 배려를 권리처럼 이용하는 소수 때문에 상처받은 이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성숙하고 고마운 마음을 허공 속으로 흩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에게 잠시 숨 쉴 틈이 되어주고, 세상에 조금이나마 온기를 불어넣는 그 마음을 '미련하다'는 말로 폄하되지 않게 지켜주고 싶다.
'배려'라는 말이 다소 고루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자로 배려는 짝 '배'자에 생각할 '려'자를 쓴다고 한다. 짝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마치 한성이와 준우 같다.
학창 시절, 짝꿍의 얼굴을 살피고 먼저 말 한마디 걸어주던 그 순간처럼, 필통을 들고 오지 않은 친구에게 내 지우개를 건네주며 괜히 뿌듯했던 그 마음처럼. 그 정도의 마음을 내어줄 수 있다면, 세상은 조금 더 살아볼 만해 지지 않을까.
작고 사소한 마음 씀에는, 다른 사람을 지켜주는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