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잃어버린 질문 : 소신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님의 책에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와 서울대, 연세대 등 이른바 명문대에서 토론 수업(그는 '토론'보다 '숙론'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제안한다)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지금껏 끊임없이 토론 수업을 했는데, 솔직히 말해 한국에서는 단 한 학기도 재밌게 해 본 기억이 없습니다'
놀라울 만큼 솔직한 고백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인 서울대에서의 수업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그는 왜 서울대 학생들이 토론에 소극적일까 고민한 끝에, '지나친 눈치'를 원인으로 꼽았다. 학생들이 주변을 지나치게 의식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학생들은 학기 말이 되어야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서로를 파악한 뒤 '내가 이 정도 말해도 친구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겠지?'라는 안도감이 생기면 그제야 말문이 트인다는 것이다.
좁은 땅덩어리, 높은 인구밀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도, 회의 자리에서도, 심지어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생각을 자신 있게 드러내길 주저한다. '혹시 튀면 어쩌지', '괜히 욕먹지 않을까'하는 불안이 입을 막는다. 그렇게 우리는 몸을 사리고, 중립을 지키며, 대세를 따른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풍선처럼 말이다. 나 역시 그중 한 명이다.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종종 세상이라는 거대한 시소 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이쪽저쪽으로 기울며 허공의 바람을 느껴보지만, 정작 왜 시소를 타고 있는지는 잊은 채다. 다리를 동동 구르며 조금이라도 유리한 쪽에 서보려 애쓰지만, 어느 쪽이 옳은지, 어떻게 하면 즐겁게 탈 수 있을지 고민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문제 속에서 우리는 생각 없이 휩쓸린다. 나도 모르게 '무지성 시소 타기'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진다. 자신의 판단으로 시소를 타는 사람, 즉 남의 시선과 이익, 흐름과 욕구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생각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뜻밖에도, 그런 사람들을 나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본 적이 있다. 자기 생각을 솔직히 말하고, 때로는 관성처럼 굳어 있던 내 생각을 뒤흔들어 놓는 아이들 말이다.
그 해 5학년 교실의 두 남학생이 떠오른다. 지훈이와 윤수다.
지훈이는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는, 마치 선비 같은 아이였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편은 아니었지만 묵묵히 성실했고, 공부와 운동, 음악과 미술까지 두루 잘했다. 예의도 바르고 친구 관계도 원만해서 무엇이든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반면 윤수는 지훈이의 완전한 반대편에 서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눈치 없이 오버하는 애'로, 담임인 내겐 '아픈 손가락'이었다. 나쁜 의도는 없었지만 산만했고, 주목받기 위해 일부러 과한 행동을 했다.
예를 들어 퀴즈 시간에 정답을 큰 소리로 외치거나, 놀이 중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을 만들어 시간을 끈다거나, 분위기를 몰라 장난을 치는 식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튀어나오는 '눈치 없는 행동'은 종종 놀림거리가 되었다. 아이들은 윤수가 수업의 흐름을 끊을 때마다 핀잔을 주었고 '또 그런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윤수는 좀처럼 주눅 들지 않았다. 잠깐 움찔할 뿐, 금세 오뚝이처럼 일어나 날 선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비슷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윤수의 이미지는 점점 좋지 않게 굳어졌다.
어느 여름 점심시간이었다. 5교시가 시작되기 전,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윤수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윤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피구를 하다 윤수가 공에 맞고도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안 나가?", "공 맞았잖아!"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목소리에 상황이 격해지자 아이들을 일단 자리로 돌아가 앉히고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었다. 얼굴이 잔뜩 울그락불그락해진 한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점심시간에 짝수 홀수 나눠서 피구 하는데요, 김윤수가 공을 맞고도 자꾸 안 나가요"
"맞아요! 김윤수가 자꾸 안 나가서 게임도 몇 번 못했어요!"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윤수가 그동안 보여준 행동 때문에 아이들이 유독 박하게 굴고 있었다. 나는 바로 윤수에게 물었다.
"윤수야, 친구들 말이 맞니?"
"아니에요! 저 진짜 땅볼로 맞았어요. 아니라고 했는데 애들이 자꾸 나가래요!"
억울함으로 목소리가 높아진 윤수의 안경에 김이 서렸다.
"야, 김윤수 고집 좀 부리지 마. 땅볼이 아니라 발 맞고 땅에 맞은 거잖아"
"그러니까, 인정할 건 좀 하자"
"아 진짜 아니라니까? 왜 나한테만 그래!"
발끈한 몇몇 아이들이 이때다 싶었는지 쏘아붙였고, 윤수도 지지 않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김윤수, 너 진짜 억지 좀 그만 부려!"
"맞아. 너 때문에 시간만 날렸잖아"
원성이 점점 더 거세졌다. 평소 조용히 관망하던 아이들까지 가세해 한 마디씩 거들며 윤수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동화 속 난쟁이들이 거인을 꽁꽁 묶듯, 윤수를 점점 말로 포위되고 있었다.
"맞아. 나도 발에 맞은 거 봤어"
"응, 나도 봤는데 좀 그런 것 같더라"
심지어 피구를 하지 않았던 아이들까지 추측성 멘트를 남발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윤수의 얼굴은 억울함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그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지훈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윤지야, 너 아까 미끄럼틀 쪽에 있지 않았어? 지금 말하는 거 정말 너 생각이야?"
"아.. 그냥 그런 것 같다고"
윤지가 당황했는지 얼버무리며 말했다. 그러자 지훈이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얘들아, 공이 땅 쪽으로 세게 날아갔잖아. 윤수 말이 맞을 수도 있잖아. 너무 심하게 몰아가는 거 아니야? 그리고 솔직히 우리도 애매할 땐 그냥 넘어가잖아."
교실에 적막이 흘렀다. 지훈이의 말은 잔잔한 연못에 떨어진 조약돌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윤수가 아웃이면 솔직히 우리도 다 아웃 아닐까? 윤수만 탓하는 건 좀 잘못된 것 같아"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이 '윤수가 또 억지를 부렸다'는 의견에 고개를 끄덕일 때, 지훈이는 혼자서 그 흐름을 거슬렀다. 이미 대세가 결정된 상황에서도, 개의치 않고 자신이 생각한 바를 꿋꿋이 말했다. 불타오르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윤수를 나무라던 아이들의 입이 꾹 닫힌 것을 보니 지훈이의 말이 뭔가 켕기는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딴청을 피웠다. 더 이상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지훈이는 평소에 크게 나서는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윤수와 그리 친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생각을 담담히 말했다. 눈치 보지 않고, 담담하게 자기 생각을 내놓았다.
지훈이는 군중 속에 섞인 이름 없는 한 명이 아니라, 교실의 중심에서 온전한 목소리를 낸 한 사람이었다. 자기 생각을 가진, 한 사람으로서 분명히 존재하는 아이였다. 적어도 지훈이는 시소의 왼쪽에 올라타야 할지, 오른쪽에 올라타야 할지 알고 있었다. 한쪽에 몰려 앉아 엉덩방아를 찧는다 해도, 설령 혼자 앉게 되어 허공에 붕 뜬다 해도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를 아는 아이였다.
세상에는 하루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수없이 생겨났다 사라진다. 나는 여태껏 진짜 내 생각을 말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을까. 아니 행동이 어렵다면 최소한 내 의지대로 '생각'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을까. 가령, 귀찮다는 이유로,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미움받기 싫다는 이유로 휩쓸림에 몸을 맡겨버린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나는 얼마나 자주 안전한 길만을 따라왔는지, 얼마나 자주 나를 속여왔는지 되묻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거대한 시소 위에 올라타,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상하운동을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누군가의 손끝에 매달려 움직이는 마리오네트가 아니다. 시소 위에서도 어느 쪽에 몸을 실을지, 왜 그 자리를 선택하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다.
적어도 시소를 왜 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어느 쪽이 맞는 방향인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소신은 권리이며, 자신의 심지를 똑바로 세우는 일이다.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어렵더라도 짧은 인생, 옳다고 믿는 것을 적어도 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줏대 있게 살고 싶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이해관계, 주변의 흐름과 욕구에 흔들리지 않고 내 마음과 생각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소신 있게 한 걸음씩 내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