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 중환자 병동의 쌍둥이 레지던트 이야기
화상 중환자 병동을 담당하던 어느 한 주에 일어난 일이다.
화상 중환자 병동을 담당할 때에는 화상 전문 외과의사와 담당 성형외과 레지던트와 함께...
화상 중환자 병동에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치료 및 관리한다.
화상 중환자 병동 담당 성형외과 레지던트가 아무래도 낯이 익다 생각했는데...
이전에 화상 중환자 병동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 레지던트였다.
같이 일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기에 먼저 아는 척을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쪽에서도 크게 아는척하거나 반가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보통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기 전에 화상 중환자 병동 환자 명단을 앞에 두고,
성형외과 레지던트와 함께 명단 내의 모든 환자들의 치료 계획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는 과정이 있다.
이 과정을 RTL (Running The List)라고 하는데 해당 레지던트와 한창 RTL을 진행하던 와중에...
잠깐 머리를 식히려고 주위를 둘러보던 때였다.
그날따라 웬일인지 화상 중환자 병동의 연락 명단이 눈에 들어왔다.
연락 명단에는 화상 중환자 병동을 담당하는 성형외과 레지던트가 자신의 이름과 연락수단을 적어놓고...
자신이 또 다른 성형외과 레지던트(=갈리아)의 쌍둥이 자매라는 사실을 같이 적어 놓았다.
그 연락 명단에 쓰여있는 내용을 보고 나서야 그 순간에 환자 명단을 짚고 넘어가던 성형외과 레지던트가...
내가 알던 그 성형외과 레지던트 (=갈리아)가 아니라 그 쌍둥이 자매 (=키아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연락처 명단에 나와있는 대로...
혹시 이곳 성형외과 레지던트인 '갈리아'의 쌍둥이 자매인지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모든 사람들이 유심히 읽어 보지도 않는 연락 명단을 봐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본인은 '갈리아'의 쌍둥이 자매가 맞다고 했고 본인의 이름은 '키아나'라고 했다.
자기는 쌍둥이 자매인 갈리아와 같은 연차인 성형외과 레지던트는 맞는데...
다른 병원 (UIC) 성형외과 레지던트이지만...
이곳 병원 (UC) 화상 중환자 병동 로테이션을 돌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외모가 똑같은 것을 넘어서서 목소리나 말투도 완전히 똑같아서 도저히 구분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그나마 본인 스스로 자체 인증을 해주고 나서야 다른 사람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나는 핸드폰으로 그날의 날짜를 확인하고 있었다.
왜냐면 너무 똑같이 생긴 사람이 본인은 다른 사람이라고 셀프인증을 하긴 했으나
혹시나 모르기 때문에... 이 사건이 벌어지던 그날이 만우절이 아닌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만우절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정도로 너무 똑같이 닮은 쌍둥이 자매였다.
그렇게 의외의(?) 발견을 뒤로하고 화상 병동 환자 명단을 다 짚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외과 중환자실에서 내가 담당하고 있던 환자들과 화상 중환자 병동의 모든 환자들을...
그날 중환자실 당직 전문의한테 인수인계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바로 외과 중환자실 직무실로 넘어가서 그날 당직 예정인 외과 중환자 전문의를 찾았다.
외과 중환자실을 담당하는 당직 전문의에게...
모든 외과 중환자실과 화상 병동의 내 환자 명단 전체를 성공적으로 인수인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혹시나 생길 수도 있는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당직 전문의에게 미리 귀띔을 해주어야 했다.
"혹시나 해서 미리 알려드리는데... 지금 화상 중환자 병동을 담당하는 성형외과 레지던트는...
우리가 알던 그 레지던트 (=갈리아)가 아니라 그 쌍둥이 자매인 키아나이니, 헷갈림에 주의하세요"
그렇게 말해주자, 당직 예정인 전문의가 웃으면서 자세하게 인수인계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인수인계를 하고 있던 중환자실 의료진용 직무실안에서...
자기 할 일 하느라고 매우 바쁜 줄 알았던 외과 레지던트 하나가 하이톤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비명을 지르면서 자리에서 굴러 떨어지듯이 일어나더니 나를 보면서 외쳤다.
그 외과 레지던트의 두 눈에는 충격과 공포가 가득했다.
"오늘 아침에도 분명 갈리아를 화상 병동 근처에서 보고 인사를 했는데...
약간 머뭇거리다가 인사도 받아줬단 말이에요. 말도 안 된다. 정말!"
"머뭇거리다가 인사를 받아서 나한테 뭐 기분 나빴던 것이 있었나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갈리아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니... 오 마이 갓! 미쳤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과 공포에 가득 질린 눈동자는...
내가 지금 갑자기 공포 영화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보니...
좀 전에 환자 명단을 짚고 넘어갈 때, 키아나가 했던 인상적인 말이 떠올랐다.
자기 쌍둥이 자매인 갈리아가 이곳에서 이미 레지던트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그 쌍둥이 자매라고 착각하는 그런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어느 정도 흐름에 어느 정도 순응하면서 나가기로 (Go with the flow) 했다고...
키아나가 분명 이렇게 말했던 것이 뚜렷하게 기억이 났다.
또한 본인이 쌍둥이 자매인 것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고도 말했다.
그런 흐름에 순응하는 (Go with the flow) 움직임 중에 하나가...
자기에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에게 마치 쌍둥이 자매인척 인사를 받아 주는 것이었나 보다.
다시 생각해 보니 비명을 지르던 외과 레지던트의 심경도 이해가 가는 게...
분명 자기 친구인 줄 알고 인사를 건넸고, 상대방이 받아줘서 본인은 당연히 자기의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자기 친구가 아니라 그 쌍둥이 자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분명 귀신을 본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으리라.
그렇게 쌍둥이의 난 사건이 있은 후로 몇 달 후에 다시 화상 중환자 병동에 돌아갔을 때...
이번에는 '갈리아'가 화상 병동담당 레지던트로 있었다.
분명 지난번과 똑같은 얼굴과 말투였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키아나가 아닌 갈리아라고 한다.
대화를 나누기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 성형외과 레지던트가 '갈리아'가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을 하고...
그날이 만우절이 아닌 것을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나서야...
그 레지던트 (=갈리아)와 차분히 앉아서 화상 중환자 병동 환자 명단을 짚고 넘어갈 수 있었다.
환자 명단을 전부 짚는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지난번 키아나와 관련된 사건들에 대해서 슬쩍 물어볼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갈리아는 쌍둥이 자매인 키아나와 관련된 모든 일들은 이미 다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갈리아가 해주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쌍둥이를 헷갈려서 발생한 사건의 피해자가 그 외과 레지던트 한 사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선의의 피해자들이 더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갈리아라고 생각한 많은 사람들이 키아나와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나중에서야 그 사람이 갈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이 사건들을 나는 '쌍둥이의 난(亂)'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갈리아는 쌍둥이 자매인 키아나와 관련된 사건들을 전부 이야기해 주면서...
2달 후에는 자신이 UIC 병원에 두경부 안면 로테이션을 돌러 가게 된다고 말하면서...
이번에는 'My Turn = 자기 차례' (?)라고 했다.
대체 뭐가 자기 차례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대충 말하는 뉘앙스와 톤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이곳 병원에서 일어난 '쌍둥이의 난(亂)'이 이제는 키아나가 일하고 있는 병원에서 일어날 예정인 듯싶었다.
다만 갈리아 본인 말로는 본인이 그곳 병원 부속 의대를 졸업했기 때문에...
이곳 병원에서 일어난 '쌍둥이의 난(亂)' 보다는 혼란이 훨씬 적게 일어날 거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해자와 한통속(?) 혹은 가해자 그 자체(?)인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이미 헷갈렸거나, 앞으로 헷갈리게 될 미래의 수많은 피해자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을 듯한데...
부디 그쪽 병원에서는 선의의 사람들이 '쌍둥이의 난(亂)' 피해를 당하고 멘붕에 빠지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
나중에 구글로 검색을 해보니 쌍둥이 자매가 다니던 의과대학 홈페이지의 몇 년 전 뉴스에서...
해당 쌍둥이 자매에 관한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의과대학 같은 학년의 쌍둥이가 서로 다른 병원 성형외과 레지던트에 매치된 것을 축하하는 뉴스였다.
이렇게 이전 시절 사진으로 나란히 보니까, 쌍둥이 자매가 사뭇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데...
실제로 볼 때에는 왜 그렇게 구분이 잘 안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음의 확률 문제를 풀어보도록 하자...
(1) 쌍둥이 자매가...
(2) 같은 도시 안에서...
(3) 서로 파견 로테이션을 주고받는 다른 두 병원에서...
(4) 성형외과 레지던트 같은 연차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확률 계산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으나, 그다지 높지 않을 확률일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높지 않은 확률을 뚫고 위의 모든 사항을 다 만족해 버려서...
친구에게 인사만 했을 뿐인 아무 잘못도 없는 외과 레지던트가 완전 멘붕에 빠지고...
다수의 피해자가 속출하는 사고(?)인 '쌍둥이의 난(亂)'이 발생한 것이다.
왜 내 주변에서는 이와 같이 상당히 드문 일들이 상대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것일까?
누가 좀 답을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