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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인 저혈압 치료제

수술 후 회복실에서의 한 아주머니 이야기

by 시카고 최과장

이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보통 마취과 전문의로서 수술실을 커버할 때에는 크게 3가지 일들을 하게 된다.


첫 번째는, 수술 전 대기실에서 환자를 직접 대면하고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마취를 할 수 있는 최종 마취 계획을 결정할 수 있게 되는 수술 전 대면이다. (Pre-anesthesia Assessment)


두 번째는, 가장 중요한 단계로서 실제로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안전하게 마취를 유도하고, 수술하는 동안 환자의 혈역학적 동향을 계속 모니터링하는 일이다. 이 두 번째는 마취 유도 과정과 마취 유지 및 모니터링 과정으로 나눌 수도 있다. (Intraoperative Management)


세 번째는, 수술이 끝난 후에 어느 정도 마취가 풀리고 난 환자를 수술 후 회복실 (PACU)에서 최종 확인하고 안전하게 회복실에서 퇴원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Postoperative Check)




일반 수술방을 맡아서 마취를 담당하던 날이었다.

비교적 일반적이면서도 간단한 복강경 담낭 제거술을 위해서 전신 마취를 걸었던 60대 초반 여성 환자를 수술 후 회복실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때였다.


수술 후 메스꺼움이나 구토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는지,

혹은 수술 후 각막 찰과상등이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인데,

이 환자에서 그런 문제는 다행히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수술실에서 나온 이후로 그 환자의 혈압이 계속 낮은 편이었다는 회복실 간호사의 설명이 있었다.

Hypotension_Numbers.jpg


수술실 안에서의 마취가 별다른 문제없이 끝났기 때문에, 별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환자에게 지금 혈압이 좀 낮아서 간단하게 치료를 필요로 하는 것 말고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말해줬다.


그랬더니, 환자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기 남편을 한시바삐 불러 달라고 했다.

보통 수술 후 회복실 간호사들은 환자가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도...

환자 가족들에게 더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난 다음에야 가족면회를 허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나로서는 일단 환자에게 치료 계획을 알려주고, 가족 면회는 일단 조금 기다려 달라고 했다.


비교적 자세한 설명 후에도, 환자는 계속해서 자기 남편을 빨리 불러 달라고 했다.

그래서 혹시 남편을 빨리 불러야 되는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환자가 말하기를...

자기 남편 얼굴을 보기만 해도 본인의 혈압이 즉석에서 많이 오를 테니,

저혈압 치료를 위해서라도 빨리 자기 남편을 불러달라고 했다.




분명 미국병원의 백인 아주머니 환자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 병원의 한국 아주머니 환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심각한 착각이 일어났다.


"남편 얼굴만 봐도 순간적으로 화가 솟구쳐 올라와요" 하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가 아니었나?

아님 원래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정서였던가?

Fuming_Angry.jpg

엄청 헷갈린다.



일단 정맥으로 수액을 500 ml 정도 주면서, 동시에 환자 요구대로 남편을 빨리 부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그 환자 담당 간호사에게 조언해 주고, 30분 이후에 환자 상태를 다시 살펴보겠다고 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 환자를 다시 확인하러 갔는데...

환자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별로 좋지 않아 보이기는 했으나, 혈압이 정상 범위를 넘어서 오히려 높은 수준으로 올라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환자 옆에는 환자 남편으로 추정되는 분이 앉아 있었는데...


환자 남편과 그 옆에서 표정이 아까보다 안 좋아진 환자를 보고 나서...

이제는 정상보다 오히려 높아진 혈압 수치를 바로 확인하게 되니...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한 위기가 있기는 했지만...

환자에게 이제 아무 문제없으니 퇴원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환자의 혈압이 효과적으로 올라간 것은 수액요법 때문이었을까?


아님 환자의 예상대로(?) 남편이 혈압 상승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일까?





p.s.

이 일화를 우리 부인에게 이야기 해주었더니, 엄청 큰 파안대소 (破顔大笑,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활짝 웃음) 가 터졌다.

유난히 엄청 즐거워 하는 것을 보니, 나중에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면 아마 나도 바로 저혈압 치료제로 동원이 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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